우리만의 암호 생각하기
혹시 전설의 ㄹㅇㄱ.jpg를 아시는지. 어떤 인터넷 게시글에 카톡 대화 사진이 연이어 올라와있는데 매일매일 피씨방에 가는 친구와의 대화인지, 열흘 내내 채팅방에 비슷하게 서로 일어났냐고 한 뒤 레온 PC방으로 데려간다. 마지막 사진에는 “ㅇㅇㄴㄴ? “ㅈㅇㄴ” “ㄹㅇㄱ” (일어났냐?-짐인남-레온고) 등 자음으로만 대화하는 현상이 포착된다. 언제 말을 걸든 2시즈음 가게 되는 것도 웃긴 부분이었다. 매일매일 일어나서 함께 게임을 하는 사이, 라는 점이 너무나 명확한지 뭘로 말해도 서로 찰떡같이 알아듣는 레온고 친구들. 아마 나중에 뇌파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인터페이스가 도입되더라도, 둘은 손잡고 레온PC방에 가지 않을까. 오히려 바로 알아들을 수 있다고 좋아하겠지.
나와 남편에게도 우리들만이 아는 암호같은 대화들이 있다. 레온고 친구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효율을 극한으로 중시하지만 우리의 암호들 대부분에는서로를 웃기기 위한 드립들이 양념처럼 가미되어있다. 귓속말로, 맞잡은 손으로, 과장된 웃긴 표정들과 우리만이 아는 단어들로 하는 의사소통들. 함께한 세월이 오래되었는지, 우리는 이런 암호들을 무척 많이 만들었다. 서로에게 붙이는 애칭만큼이나 그런 암호와 행동들이 우리의 대화를 가득 채우고 있다.
가끔 나는 외계인이 우리를 본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만 이렇게 번민하는 존재인가 싶어질때 주로 하는 생각이다. 근데 외계인들이 우리 대화를 해석하려면, 아무리 좋은 한글 번역 AI를 가져와도 이해하지 못하리란 생각을 한다. 레온고 친구들은 참고할 만한 카톡 대화 내용이 위에 있었지만, 외계인에게 우리의 역사를 일일히 보여줄 수는 없을테니까. 아마 60%이상이 암구호라고 생각하며 해석을 포기하겠지.
예시 하나. 우리의 정상회담식 화해법. 화해를 청하는 사람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불쑥 왼손을 내민다. 상대방이 손을 굳세게 붙잡고 악수를 한다. 이 때 절도있게 세 번정도 손을 흔들어야 한다. 이윽고, 반대편 손으로도 악수를 하면서 세 번 정도 흔든다. 이어 살짝 서로를 안는다. 다정한 포옹은 아니고, 조금 무뚝뚝하게 안고 어깨를 세 번 두드린다. 이 포옹이 끝날때까지는 한껏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하는게 포인트다. 바깥에서는 이 모든 행동을 크게 할 수 없으니 손을 슬쩍 잡는다. 손바닥을 맞대어 악수를 하면 상대방이 손을 비틀어 반대쪽으로 악수하고 그 이후 손바닥을 서로 두드린다.
이런 화해법을 언제부터 도입했는지 잊어버렸다. 이김에 유래도 한번 찾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생각나진 않는다. 동유럽식 악수가 이런거라 생각한걸까. 김정은도 푸틴도 정상회담에선 웃으며 악수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른다. 이건 사실 적당한 화해를 위해 쓰는 방법이다. 아직 화가 났지만 내가 화낸것에 미안해질때. 혹은 입밖으로 미안해, 라고 말하기엔 아직 나의 화도 안 풀렸을때 주로 취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면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니 적당히 화를 풀어주고 시도해야 한다. 안그러면 역효과다. 행동 패턴으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대충 내가 갑자기 화를 팩 내다가 5분 뒤 슬그머니 손을 내미는 식이다. 뚱해있던 남편이 손을 슬며시 잡으면 그때부터 정상회담식 화해법이 시작된다.
예시 둘. 우리의 점수 노트. 우리는 밤 12시쯤 노트 앞에 둘러앉아 진지하게 설거지 2점, 같은 단어를 외친다. 우리의 용돈 노트다. 하루에 잘 한 일, 못한 일을 진지하게 읊고 서로가 생각하는 점수를 뒤에 읊는다. 점수는 점당 백원이다. 처음 시도한 건 9년 전이었고 결혼 이후 본격적으로 정착한 3년차 시스템으로서, 직접적으로 용돈에 반영이 되는 인센티브제를 택하고 있다. 기본은 월 삼만원이지만 더 쓰고싶으면 하루종일 목숨걸고 좋은 일을 차곡차곡 모아서 기를 쓰고 용돈으로 엿바꿔먹는 시스템. 하지만 지나치게 많이 점수를 요구하면 (전직) 게임 밸런스 디자이너인 남편에게 합의를 거부당한다. 이 점수 체제는 자주 뒤바뀌기도 한다. 예전엔 점당 200원이었으나, 즉 점당 200원→100원으로 확 줄었다. 한동안 나는 과음과 기호식품 과소비로 세 달치 용돈을 가불한 적이 있었다. 남편 말로는, 월급받으니까 DSR(...)을 허용해준다고 했다. 남편은 시계를 사서 3000점을 한번에 까먹은 적이 있다. 한동안 잘 못쓰다가 요즘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어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우리가 만든 암호같은 의식과 이를 둘러싼 대화법들을 생각해본다. 사실 시답잖은 드립과 웃긴 표정 짓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시시콜콜하고 독특한 우리들만의 대화법을 사랑한다. 이전에는 관심사가, 가치관이 일치한 사람이 대화를 잘 할 수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의외로 나와 남편의 관심사나 가치관은 전혀 비슷하지 않다. 지금은 이런 요소들이 가장 이 사람을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아니까.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니까.
+한참 예전에 써두었는데 카톡 프로필에 브런치 작가 타이틀을 달아보고싶어서 올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