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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페이퍼 너마저

음악프로듀서와 노래방사이

by 완자

헤어짐에 앞서 추억을 담아 한 줄씩 덕담을 써주는 롤링페이퍼. 이 종이에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활자화하여 적는 사람이 있었으니.


때는 중학교 2학년. 한 학년을 마치면서 롤링페이퍼를 돌렸다. 친하지 않았던 친구에게는 '다음에는 더 친하게 지내자.' 친했던 친구에게는 '덕분에 즐거운 1년이었다'라는 상투적이지만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한 줄씩 쓰곤 했다. 한 반에 50명도 넘던 시절이니 한 명 한 명 길게 혼을 담아 쓰기에는 시간이 모자라다. 그렇게 54명분의 롤링페이퍼를 쓰고 나니 친구들이 써준 롤링페이퍼가 내손에 돌아왔다.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흐름의 이야기 속에 단연 테이스트가 다른 내 심장을 후벼 파는 문장이 있었다.


'목소리가 이상하다.'


절망적이게도 나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우리 반 54명의 글씨체를 거의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문장의 주인은 나와 그다지 친분이 없는 남자아이였다. 친하면 그나마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아닐지도) 하지만 그는 나와 전혀 친분도 접점도 없었다. 심지어 그 친구는 농담 한 번 하지 않고 조용히 수업을 듣는 모범적인 친구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문장은 세상에 더없는 진실로 다가왔다. 물론 그는 롤링페이퍼의 사전적 의미에 따라 한 해 동안 친구들과 지내며 느낀 감정을 충실히 기재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화법은 대단히 위험하다. 나 같은 사람은 30년 넘게 이렇게 마음에 품고 살기 때문이다. 마음에 두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이렇게 글로도 남기니까 말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자라서일지도 모르지만 라디오를 애착인형처럼 품에 끼고 살았다. 주말에 인기가요 순위발표가 있는 날에는 공테이프를 넣고 녹음하느라 혼자 분주했다. 마치 디제잉을 하듯 녹음버튼과 플레이버튼, 스톱버튼을 현란하게 눌러댔다. A면에서 B면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좋아하는 노래가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며 말이다. 그렇게 완성한 나만의 카세트테이프를 주르륵 늘어놓고 표지를 만들며 플레이리스트를 손으로 꾹꾹 써 내려갔다. 마치 음악프로듀서가 된 마냥 흐뭇했었다. 내가 그들을 가수로 만든 것도, 그들을 위해 곡을 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여러 명반을 탄생시키는 사이 나는 성인이 되었고 '노래방'이 나타났다.


세상에, 너무 신난다!

그렇게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어느 날, 같이 노래를 부르던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근데 너는 왜 남자노래만 불러?"

"?!"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취향도 취향이지만 내가 부를 수 있는 음역대는 남자음역대였던 것이다. 중2 때의 롤링페이퍼가 머리를 스쳐갔다.


신은 나에게 54명의 글씨를 알아볼 정도의 눈썰미를 주셨지만 높은 음역대의 성대와 남의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포용력은 덜 주신 것 같다. 이렇게 30년이 지나도 나는 그 친구의 이름도 얼굴도 어느 하나 잊지 않고 있다. 앞으로 만날 일 없는 또 이 글을 볼 일 없는 그 친구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친구야, 목소리만 이상하다고 써줘서 고마워. 얼굴까지 이상하다고 했다면 아마 내가 크게 삐뚤어졌을 거야. 내가 비록 목소리는 낮고 이상하지만 남자가수곡으로 노래방에서 100점도 받으며 잘 지내고 있어. 너의 T적인 생활에도 안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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