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과 헤어롤사이
문뜩문뜩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길 가다 비친 차창 속의 내 모습에, 회사 엘리베이터 문에 비춘 내 모습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낯은 익는데 낯선 당신은 누구신지. 나인 듯 내가 아닌 나 같은 너. 누구신지.
비가 오지 않아도 머리카락에 힘이 없어 축축 쳐진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머리 윗부분이 납작해지는 현상. 특히나 앞머리가 추욱 쳐져 깻잎처럼 이마에 철썩 붙어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헤어롤을 앞머리에 말고 지하철에 앉아있던 사람에게 눈쌀 찌뿌리던 나를 반성한다. 헤어롤이라는 선택, 나쁘지 않을지도. 그녀도 극한의 지점에서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의 일이다. 맞은편에 서 있던 분이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언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그 말 듣자마자 막 기분이 나쁘기 시작했는데요?
아. 저. 씨.?!
“앞머리 쪽이 좀 비었네. 내가 8층에서 탄 언니한테도 우리 제품 이야기했었는데 사용해 보더니 좋다고 하더라고. 내가 ‘언니’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야."
썩은 미소를 전면에 내세우며 '네'도 '아니요'도 아닌, 알 수 없는 의성어를 내뱉고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당신의 앞머리가 많이 비어 보인다는 말을 지체 없이 할 정도로 나의 앞머리는 긴급한 상황이었던 것일까. 또는 본인 회사의 제품에 대한 강력한 자신감이었을까. 아니면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영업을 하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열정적인 분이어서였을까.
재빨리 회사로 복귀한 후 그 회사의 이름을 찾아 검색해 보았다. 모발과 탈모에 관련된 여러 가지 제품들이 있었다. 주르륵 라인업을 살피고는 흥.! 하며 창을 닫았다. 결단코(아마도) 제품들이 비쌌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얇은 머리칼이 남이 보기에도 얇다는 그래서 머리가 제법 휑해 보인다는 사실을 웃으며 받아들이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라고 해두겠다. 남편의 가운데가 휑한 뒷머리를 도넛 같다며 놀려대던 나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인가.
요즘은 안팎으로 나이 듦을 부쩍 자주 마주하며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갱년기로 인한 내 안의 롤러코스터에 더해 아무 생각 없이 커피 한잔 들고 탄 엘리베이터에서 불현듯 다가오는 언니를 위한다는 한마디까지. 이런 잽을 연속적으로 맞다 보면 때로는 그냥 둘 수 없는 생채기가 되곤 한다. 다 똑같이 평등하게 먹는 나이인데 아웃풋이 저마다 다른 건 인격 때문일까.
앞으로 예고도 없이 다가올 듣도 보도 못한 시련들이 많겠지만 또 비록 머리 앞부분이 조금 휑하고 희끗희끗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흑채를 다 쏟은 것만큼 풍성하게 살고 싶다. 그러면 내가 날린 부메랑도 박씨를 물고 돌아와 주겠지. 가만, 일단 다리 다친 제비를 찾아야겠네.
그러고보니 이런 인격이라서 머리가 얇아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