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밥과 잡곡밥 사이
한발 더 왼쪽으로 가세요.
아니, 몸통은 그대로 두시고요.
어깨에 힘 빼시라니까요.
팔은 앞으로 뻗어서 손잡이 잡고 계세요.
아니요, 다시 한번 갈게요. 어깨가 나오면 안 돼요.
정말 악!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파서 그대로 뒤통수부터 쓰러질 지경이다.
하지만 좀처럼 OK사인이 나지 않는다.
내 소중한 가슴을 모으고 모아 차가운 판 위에 올려놓으면 또 다른 판이 내려와 무자비하게 가슴을 짓누르고 잠시 후 떨어진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나 싶을 정도의 압력으로 누르고 사라진다. 오른쪽 가슴, 왼쪽 가슴을 각각 2번씩 총 4번 찍어 누른다. 이 검사를 20년이 넘게 받아오고 있지만 기계의 혁신, 변화, 진화라는 것을 나는 느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왜인지 늘 생각한다. 이러한 방식을 제외하고는 유방엑스레이 검사는 불가능한 것일까. 더 좋은 기계는 만들 수 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나부터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십시일반 자금을 구하는 운동을 시작해 볼 수 있다. 그 정도로 절박하다.
가족력으로 인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엄마 손을 잡고 유방외과를 찾았었다. 처음 검사를 받고 충격이 너무 심해 만나는 모든 친구들에게 이 검사가 현재 인간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과연 마땅한 일인가. 너무나 반인류적이 아니냐며 침이 튀기게 이야기했었다. 20년 넘은 지금도 검사받으면서 매번 놀란다. 아니, 이렇게 변화가 없을 수 있는가. 모두 익숙해진 건가. 나만 매번 이렇게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가.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며칠 전에 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잊을만하면 나를 찾아오는(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내 손으로 예약한) 문자. 무거운 발걸음과 더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향한다. 몇 번째 검사인지도 모를 만큼 여러 번 했지만 전혀 아픔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말에 안도하며 아픔의 대가가 건강이라면 참을 수 있다. 고 잠깐 생각해 본다. 이제 우주로 여행도 간다고 하고 곧 AI가 인류를 초월한다고도 하며 화성이주 프로젝트 이야기도 들리는데 병원 안 기계는 왜 사막에서 청소한다고 청소기 돌리는 냥 이렇게 주먹구구식인 느낌인 것인가.
올해는 반백살을 앞두고 대장내시경도 해보기로 결심했다. 3일 전, 2일 전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 그림으로 그려진 안내문을 살펴보았다. 파, 김치, 깍두기, 양배추, 시금치, 다시마, 미역, 잡곡밥, 현미밥, 콩나물, 버섯, 김, 콩류, 샐러드, 깨, 오렌지, 귤, 키위, 수박, 참외 같은 씨 있는 과일 등등. 이것들을 빼고 나면 식사로 하나도 먹을 만한 것이 없다.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를 하게 되는 것인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갑자기 잡곡밥에 김을 싸서 버섯볶음을 얹어 김치와 먹고 싶어 진다. 입가심으로는 참외 한 개.
램프의 지니야.
인류평화를 위해 내가 내 소원 한 가지 내놓을게. 아픈 사람이 없게 해 달라고는 안 할게. 적어도 검사받는데 망설여지지 않도록 기계라도 아프지 않게 만들어 주겠니. 꼭 좀 들어주라. 그리고 가능하면 산부인과 검사 기계도 같이 부탁해. 다소 수치스럽거든. 아, 대장내시경도 더 좋은 방법을 마련해 주면 참 좋겠다.
다음 검사 때까지 꼭 좀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