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졸음를 내쫓으려 모닝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오전 업무 시간동안 집중하여 업무를 한다. 11시 경 되었을 땐 어김없이 허기가 몰려와 동료들과 오늘의 점심 메뉴를 치열하게 토론(?)하고, 자리를 선점하려는 마음에 11시 40분부터 엉덩이를 들썩인다. 때론 선발대를 먼저 보내기도 한다. 1시간 가량의 짧은 점심 시간이 끝나면 양치를 하고 앉아 다시 업무에 돌입한다. 오후에는 회의도 많다. 회의 준비부터 회의 참석, 회의 종료 후 내용 정리, 그리고 다시 본 업무에 돌아간다. 가끔은 상사의 갑작스런 지시에 급하게 일을 처리한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가끔은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급한 업무로 우다다다 뛰어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칼퇴를 하면 6시, 아니라면 한밤중이 다 되어 하루가 마무리 된다. 집에 귀가하고, 휴식을 취하고, 내일을 위한 잠에 든다.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다. 이렇게 매일 매일 일을 위한 일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노동의 댓가로 월급을 받는다.
월급은 내 노동의 가치이자, 사회인으로서의 나를 평가하는 잣대이다.
내가 투입됨으로써 얻는 생산성을 토대로 회사가 나의 가치를 정해준 것이다. 그렇게 모든 샐러리맨에게는 본인의 가격이 머리 위에 붙어있다. 옆 팀의 과장은 6,000만원, 앞 팀의 대리는 4,500만원, 갓 들어온 신입은 3,000만원과 같이 말이다. 샐러리맨에게는 누구나 '가격표'를 가지고 있다. 이 가격표에는 각 개인의 가능성이나 인간성, 잠재적 포텐셜과 같은 정성적인 수치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전부 무시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성적인 가치보다는 그가 실제로 벌어오는 돈 또는 회사에 기여하는 정량적인 가치가 그의 가격표와 더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여느 샐러리맨들과는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
그곳은 바로
필자가 일하는 일터 외 다른 곳에서도
돈을 받고 있는 가격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필자는 회사에서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가격표와 또 다른 곳에서 돈을 받는 가격표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필자는 한국과 일본에 부동산이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니니 모두 임대를 주기 위해(빌려주기 위해) 취득한 것이다. 이 임대용 부동산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주택과 일할 수 있는 사무실, 점포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제공의 대가로 사람들은 이 부동산에게 월세를 지불한다. 그 월세는 일정 비용을 제외하고 필자에게 다시 지급된다.
*여기서 일정 비용이라 함은 부동산 담보 대출의 이자, 관리회사의 수수료, 공과금 등이다.
즉, 필자는 회사 안에서 회사일을 하며 돈을 벌고,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들은 자기의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겸직 관련하여 : 대부분의 회사는 동종업계나 본격적인 사업 등의 겸직은 불허하나, 거의 유일하게 '임대사업'만큼은 허용한다. 필자 역시 임대사업을 신고, 인사팀의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단지 내가 존재하며 직접적으로 일을 하는 것 뿐만이 아니다. 다른 존재가 나 대신 또 다른 가치 활동을 해주며 돈을 벌어다줄 수 있다.
회사가 나에게 매긴 가격표와 또 다른 내가 벌어들이는 가격표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나의 가격표를 갖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하나?
간단하다.
스스로 돈을 버는 수단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된다.
예를 들어,
남에게 땅,공간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다 = 부동산
컨텐츠가 타인에게 소비되며 돈을 받는다 = 지적재산권(책, 영상, 유료 글, 강의)
기업,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고 가치를 상승시키거나 이익의 일부를 돌려받는다 = 주식,채권
위와 같은 것들이 스스로 돈을 벌며 나의 또 다른 가격표를 만들어나간다. 물론 그것이 마이너스일 수도 있지만, 기본대로만 일하게 해준다면 대부분이 플러스일 수 밖에 없다.
왜 확신하느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 절대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본주의는 '노동'보다 '자본'을 우선시한다.
자본주의는 '내가 일하면서 받은 가격표'보다 '나를 대신해 일한 가격표'가 더 비쌀 때가 훨씬 많다.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그렇다. 불공평하다.
필자도 출발선이 달랐다. 불공평하게 태어났고, 불공평한 조건 아래 있었다. 흔히 말하는 부모의 지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대학등록금, 학원비, 결혼비용, 주거비용과 같이 말그대로 당장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한 곳에서 필자는 부모의 지원을 미리 받은, 즉 어느 정도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한참 뒤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걸을 때 필자는 뛰어야 했고, 아니, 심지어 그들이 누워서 잠을 자고 있어도 필자는 뛰어야 했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 동화의 거북이처럼 말이다.
대학등록금을 모두 납부해주는 부모가 있는 토끼와 알바를 하거나 장학금을 반드시 받아야만 했던 거북이
어학연수 비용을 모두 지원해주는 부모가 있는 토끼와 국내의 영어학원과 교육 라디오로 공부를 해야만 했던 거북이
취직을 위해 자격증 학원, 시험 비용을 납부해주는 부모가 있는 토끼와 알바를 해서 학원비와 시험비를 마련했던 거북이
서울,수도권 전세, 매매비용을 지원해주는 부모가 있는 토끼와 부지런히 모아둔 약간의 돈과 최대 대출을 받아 전세 자금을 마련했던 거북이...
쓰다보니 너무 슬퍼지니, 그만두도록 한다.
하지만 이 슬픈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결정적으로 명백한 것은 바로 그들의 속도가 나의 속도보다 단 1%라도 느리다면, 언젠간 그들을 따라 잡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어느 정도의 그 선까지만 쫓아가게 되면, 그 이후엔 그들보다 1%만 빠르더라도 가속도가 붙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 모든 것을 '받기만 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그들은 내가 따라잡고, 1%라도 빠르게 달려나갈 때 나를 따라 잡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당연하다. 받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격차는 점점 커진다.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자본주의는 불공평하다. 그러나 이 불공평함을 인정하고, 하루라도 빨리 또 다른 가격표의 원리를 깨닫고, 나보다 유리한 그들보다 1%만 빠르게 뛰어도, 분명히 나의 가격표는 급격히 늘어난다. 0에서 1이 되는 것은 어렵지만, 1에서 10이 되는 건 쉬워진다.
차후 이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하도록 한다.
지금 명심할 것은, 나에게도 '또 다른 가격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가격표를 만들어낸 자에게는
반드시 '자본'이 생겨나고, 불어나고, 보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