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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달 May 19. 2019

"나는 겨우 쓴다"는 작가

나의, 김훈 예찬론

<연필로 쓰기> 표지 뒷 면. "나는 견딜 만했다. 후져서 편안했다." 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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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의 글을 좋아한다. 이 작가만큼 글을 ‘저널리스트적으로’ 쓰면서도 아름답게 쓰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저널리스트적’이라는 것을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글의 단서나 소재가 자기 머릿속 사색이나 추측이 아닌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과 청취에 있고, 주관을 통해 맥락을 정하되 그 주관을 글에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특성’. 나는 그의 스타일을 동경한다.


김훈이 지난 3월 낸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요즘 야금야금 읽고 있다. 여러 대목에서 감탄하며 질투하고 공감하고 한편으로는 거리감을 느낀다.


감탄스러운 대목은 이렇다. 그는 ‘이등중사 박재권의 구멍 뚫린 수통’이라는 산문에서 연평도 포격 이야기를 쓸 때 연평도 주민들이 하고 있던 ‘생활’을 들여다보면서 문단을 연다.


“북한군은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를 포격했다. 이날 연평바다의 썰물은 낮 12시께 간조를 이루었다. 주민들은 오전부터 갯벌에 나가서 굴이나 조개를 캤고, 김장을 담그기도 했다. 여객선 씨플레인호는 2시경 연평도에 도착했다. 인천으로 가는 주민들은 당섬 선착장에 모여 있었다. 연평도의 학교들은 수업 중이었고, 연평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 섬마을이 어째서 포격을 맞아야 하는가. 포격은 오후 2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섬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먼저 훑는 그의 시선은 연평도 포격의 비극성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그는 마을 주민 김종규 씨 이야기도 끌어온다. 김 씨는 국군 특수부대요원 출신으로 국가유공자 상장을 가진 분이다. 김 씨는 연평도에 포격이 시작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 정부가 준 상장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혹여 북한군이 연평도에 들어왔을 때 이 상장들을 본다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김훈은 ‘삶의 길’을 찬미한다.


“나는 이 정확한 생존술을 긍정한다. (...) 이 조건반사는 이념이 아니고 당파성이 아니다. 애국이 아니고 매국이 아니고 혁명이 아니고 반동이 아니다. 이것은 충성이 아니고 배신이 아니다. 총칼을 들이대면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이념의 폭력 앞에서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훈장을 태워버리는 행위는 정직한 삶의 길이다.”


김 씨의 부인 유 씨 이야기도 나온다. 김종규 씨와 달리 ‘유 씨’의 이름은 글에 나오지 않는다. 김훈은 유씨를 그냥 ‘김 씨의 부인 유 씨’라고만 써 놨다. 김훈의 글을 보다보면 ‘이 작가는 여성을 그 자체로 완성된, 온전한, 독립적인 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이 대목은 김훈의 이 같은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 중 하나다.


그가 이름을 적지 않은 유 씨는 연평도 포격 날 집안에서 김장을 담그고 있었다. 포격이 시작됐을 때 유 씨는 김장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인천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곧 돌아와, 피난하기 전 하다 만 김장을 마무리했다. 연평도에 취재 와있던 여기자 두 명이 김장을 거들었다고 한다. 그 상황을 생각하니 기가 막혀 마음이 아리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상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가는 일의 엄중함과 찬란함을 무겁고 귀하게 여기는 김훈은 그 김장의 ‘거룩함’을 이야기한다.


그는 산다는 일의 중함이 자신의 글에 무게를 싣게 만든다. 삶으로부터 글의 힘을 빌어오는 방식이다. “어머니들이 김장을 담그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낮잠 자는 마을에 포탄을 쏘면 안 된다는 이치를 다들 스스로 알 터이다”라고 쓰는 그의 문장에서 나는 마음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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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글 쓰는 이들에게 힘을 줄 법한 글도 써 놓았다. 글 쓰는 이들은 그의 이 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써 볼 용기’를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의 의도는 물론 아닐 것이다. 그 글은 이번 산문집에 실린 ‘별아 내 가슴에’다.


“아마도 황병기 선생은 ‘영감’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 나는 사람들이 ‘영감’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내가 겨우 쓰는 글은 오직 굼벵이 같은 노동의 소산이다. 황 선생께 음악의 영감을 드렸을 그 별들은 나에게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설렘을 주었을 뿐, 써먹을 수 있는 단어 하나도 주지 않았다. 영감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자에게만 오는 모양이다. 나는 가슴에 박힌 별빛을 지니고 서울로 돌아왔다. ‘자료’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었다. 만질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영감’이 아닌 ‘굼벵이 같은 노동’으로 쓴다고 그는 적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오래 전 대가야 악사 우륵과 가야금에 대한 글을 써보려 준비하면서 가야금 거장 황병기 선생에게 연락했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황 선생이 아직 살아계실 때의 일이다.


김훈은 글을 준비하면서 삼국사기 등 옛 기록을 먼저 찾아봤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우륵의 선율이나 주법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했다. 황 선생은 우륵이 하림성에서 신라 진흥왕을 위해 한 연주를 상상으로 헤아리면서 무반주 대금 독주곡 ‘하림성’을 작곡한 바 있다. 김훈은 황 선생에게 전화해 우륵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황 선생은 “자료라. 자료가 아주 없지는 않고, 있기는 있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김훈이 거듭 조르자 황 선생은 조금 더 구체적 이야기를 해준다.


김훈은 “요약하자면 자료는 ‘별’이라는 것이었다”라고 독자에게 전한다. “밤하늘의 별은 우륵이 보았던 바로 그 별이고 또 지금의 별이니까 별은 가장 확실한 자료다… 나는 별을 보고 했다… 이런 말씀이었다”라는 것이다.


김훈은 황 선생의 말을 듣고 전율했다고 한다. “이것이 예술가로구나! 글자로 된 자료, 남이 만들어놓은 서물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게으른 자, 눈먼 자, 눈을 떠도 안 보이는 자의 허송세월이었다”라고 그는 썼다. 나는 사실, 우륵과 가야금에 대한 글을 써 보겠다며 삼국사기를 뒤져보고 황병기 선생에게 전화를 거는 그의 취재 노력에서부터 이미 감탄했다.


황 선생의 말을 들은 김훈은 우륵의 고향이자 대가야의 고토인 경북 고령으로 별을 보러 간다. 그는 별을 보면서 벅찬 감동을 느낀다. 별은 하늘에 돋아나기보다는 하늘에서 배어나오는 것이었다고, 붉은 별 푸른 별 노란 별 크고 흐린 별 작고 밝은 별 따스한 별 찬 별 서늘한 별 날카로운 별이 있다고 그는 쓴다. “내가 한 줌의 글자를 움켜쥐고 살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중생이라 하더라도 별들과 동일한 빛, 동일한 시간으로 닿아 있으므로 나는 중생이라도 미물이라도 좋았다”라는 문장에는 황 선생의 조언을 소화한 작가의 마음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는 어쩔 바를 모른다. 도리어 막막해진다. “저것이 별이로구나, 저것이 황병기 선생이 말씀하신 ‘자료’로구나. 그러나 이 많은 자료를 어찌할꼬.”


정말 좋은 것을 보거나 들었지만 ‘정말 좋았다, 아름다웠다’는 섬광 같은 느낌만 있을 뿐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어 괴로웠을 때가 문화부 공연 기자 시절 종종 있었다. 내 감정을 김훈의 감상에 덧붙이기에 부끄러우나, 나는 그 경험 덕분에 그의 글에 더욱 공감했다. ‘이 정도 되는 작가도 이렇구나’하는 생각에 위로마저 받았다.


별들이 준 설렘을 안고 200자 원고지 앞에 연필을 들고 앉았을 김훈을 떠올린다. 쉬이 문장을 적어 내려가지 못하고 ‘별들은 나에게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설렘을 주었을 뿐, 써먹을 수 있는 단어 하나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김훈을 떠올린다. 끝내 ‘내가 겨우 쓰는 글은 오직 굼벵이 같은 노동의 소산이구나’ 하며 종이에서 잠시 눈을 떼었을 이 작가의 모습을 상상한다.


굼벵이처럼 더디게, 크게 티도 안 나게 꾸준히 움직이면서 조금씩을 써나가고, 덧대고, 지우고, 다시 쓰면서 겨우 뭔가를 써나가고 있는 이 작가를 그려본다. 아직 젊어 갈 길이 먼 나는, 그 지난한 노동을 멀리서 가만히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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