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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tabook Dec 27. 2022

드디어 캐나다의 가을 입성_밴쿠버(1)

단풍국 여행 막바지에 시작된 단풍 구경

캘거리 공항. 옆에 앉은 고여사의 심기가 매우 안 좋았다. 안 좋은 걸 넘어, 말을 걸면 짜증을 확 낼만큼 엉망이었다.


"엄마, 커피 마실래? 내가 사올게."


"안 마셔."


"아이 그러지 말고. 그만 기분 풀어."


고여사가 화를 내는 건 1년에 1~2회 정도다. 평소 화내는 모습을 거의 못 본다는 뜻이다. 그런 고여사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느냐 하면.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전날 캔모어 숙소에 돌아가기 전 근처 가게들을 구경했다. 그중 우리의 눈을 끈 것은 로키 마운틴 솝 컴퍼니(Rocky Mountain Soap Company). 들어가니 다양한 색깔과 향의 비누, 바디용품, 로션, 헤어제품 등이 있었다. 패키지도 예쁘고 가격도 적당해서 여행 선물로 딱이었다. 이 친구 저 친구 생각하며 하나씩 집다 보니 장바구니가 꽉 찼다.


고여사는 둘러보다가 바디 스크럽 하나를 들었다. 살까 말까 엄청 고민하길래, 내가 옆에서 내가 부추겨서 가까스로 하나 샀다.


고여사가 돈 쓰는 데는 원칙이 있다. 쓸 만한 일이다 싶으면 과감하게 쓰고 통 크게 베풀지만, 아니다 싶으면 10원 한 장 아까워한다. 그래서 고여사는 돈이 있고, 맘에 들면 걍 구매하는 나는 돈이 없나 보다.


고여사가 이때까지 기념품 격으로 산 물건은 스크럽 하나였다. 그런데 캘거리 공항에서 수화물 검사를 하는데, 이 스크럽이 말썽을 일으켰다. 고여사의 가방이 검색대 기계를 지나자 삑삑 소리가 났다. 직원이 가방에서 스크럽을 꺼내 들고 말했다.


"이건 액체이기 때문에 기내로 반입할 수 없습니다."


고여사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말했다.


"이게 왜 액체인가요? 바디 스크럽이라고, 반 고체 상태 화장품이에요. 기울여 들어도 아래로 흐르지 않아요."


"이런 제형은 액체로 분류합니다."


고여사는 억울한 표정이었다. 영어로 말은 못 하고 제스처로 액체가 아니라는 것을 어필했다. 그러나 직원은 단호했다.


"방법은 둘 중 하나예요. 카운터로 돌아가 수화물로 부친 짐을 찾아서 넣고 다시 부치든가, 버리고 타든가."


바로 눈앞이 탑승 게이트인데, 언제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나.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엄마, 안 되겠다. 이거 두고 가자."


"안 돼. 싫어. 가져갈 거야."


"그럼 수속 카운터에 나가서 짐 찾아서 이거 넣고 다시 짐 부쳐야 하는데? 시간 없으니 그냥 포기하자."


갑자기 고여사가 직원 앞으로 갔다. 제스처를 취하며 '억울하다, 저거 가져가고 싶다'를 어필했다. 직원은 '노노'만 연발하며 눈도 안 마주쳤다. 고여사는 급기야 두 손을 들어 검지손가락으로 얼굴에 눈물을 그려 보였다. 슬프다는 것이다. 그러자 직원이 짜증을 낼 기색을 보였다.


나는 가서 고여사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그냥 가자. 외국 공항에서 이러면 괜히 트집 잡혀서 비행기 못 탈 수도 있어. 얘네들 엄청 엄격해. 그러니까 일단 가고, 나중에 또 사자."


고여사는 화가 난 얼굴로 스크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른 짐을 챙겼다. 우리 상황을 지켜본 여자 직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거 알아요. 나도 이해가 안 되니까. 왜 저렇게 빡빡하게 구나 모르겠네. 미안해요. 저 직원 대신 사과할게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우리는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았다.


"엄마, 기분 풀어."


"저 직원이 아니라, 나 자신한테 화가 나. 아침에 짐 챙길 때 생각은 했거든. 근데 깜빡하고 캐리어에 안 넣은 거야. 왜 생각을 했는데도 그걸 거기 넣었지. 한심해."


고여사는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어 자신에게 좀 많이 엄격한 편이다.


"에이 엄마, 아냐. 실수할 수도 있지. 첫날 공항에서 기억 안 나? 나 보조배터리를 수화물로 부쳐서 걸렸잖아.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해. 그때 내가 그랬을 땐 엄마 대수롭지 않게 여겼잖아."


"그건 너가 그런 거구. 이건 내 실수잖아. 용납이 안 돼."


아니, 용납이 안 될 것까지야.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자신한테 조금은 관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고여사보다 나 자신에게 훨~~씬 관대한 사람이라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고여사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고여사는 한 마디도 안 했지만, 공기 중으로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엄마, 자꾸 그러면 나도 화낸다. 이런 기분으로 있으면 남은 여행도 망치는 거야. 앞으로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러면 시간 아깝잖아. 저건 빨리 잊어."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냈다. 고여사의 속상함은 이해하지만, 더 이상 기분이 상해 있으면 여행 중 아까운 시간만 더 많아지게 된다.

고여사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딸까지 기분 상하게 될까 봐 고여사는 굳은 표정을 풀었다. 드디어 밴쿠버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제 정말 막바지구나. 우리 모녀의 가을 북미 여행은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나가니, 날씨가... 포근했다! 같은 나라 맞나? 고여사와 나는 거의 동시에 겉옷을 벗었다. 그래, 이게 가을날씨지. 우리는 로키에서 겨울을 지내고 온 것이었다. 날씨가 화창하니 고여사의 기분은 이제 완전히 풀린 것 같았다.


우리가 머물 숙소는 2.5층 집의 반지하였다. 반지하는 한국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캐나다에도 반지하 건물이 있다니. 하지만 한국의 반지하가 지하와 다름없이 쿰쿰하고 어둡다면,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창문도 있고, 1층과 똑같이 생겼는데 단지 반층 내려간 것만 다른 정도였다. (그게 바로 반지하라구요?)


해가 잘 들어 나름 만족했던 반지하 숙소


들어가니 거실과 부엌, 방, 화장실이 완벽히 갖춰져 있었다. 캐나다에서 이용한 에어비앤비는 다 좋았다. 내가 잘 골라서일까, 아니면 전반적으로 미국보다 캐나다 숙소 주인들의 수준이 높아서일까?


"엄마, 우리 나가서 밥 먹고 산책하자. 옐프로 딱 마음에 드는 맛집 찾았어.”


내가 찾은 곳은 베트남 음식점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맛있게 먹은 음식은 - 물론 고여사가 싸온 반찬이 1등이었지만- 대부분 중국, 베트남, 일본 음식 등 해외 음식이었다. 뉴욕에 있을 때도 기가 막히게 맛있는 집은 거의 이민자들이 하는 가게였다. 입맛 까다로운 뉴요커들 상대로 장사하고 살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기 때문 아니었을까?


음식점에 들어가 나는 쌀국수, 고여사는 볶음밥을 시켰다. 향신료 향이 싫다고 볶음밥을 시킨 고여사는, 내 쌀국수가 먼저 나오자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러더니 맛있는지 연달아 몇 숟가락을 더 먹었다.


쌀국수를 맛있게도 냠냠


고기와 양파가 듬뿍 들어간 진한 소고기 육수에 살짝 매운 고추까지 썰어 넣은 국물이다. 맛이 없을 리가 있나. 로키산맥을 여행하면서 추웠던 몸이 뜨끈한 국물을 들이켜자 비로소 풀리는 것 같았다. 크으. 맛있었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나와 숙소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주택가에 있는 공원인데 규모가 꽤 컸다.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근처에 규모가 좀 있는 공원이 몇 개나 되었다. 집 주변에 이런 공원이 많으면 그만큼 삶의 질이 올라갈 것 같은데. 그래서 캐나다 사람들이 여유로워 보이나?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드디어, 단풍나무를 보았다. 단풍국에서 여행 끝나기 직전 처음으로 단풍나무를 보다니. 물론 이곳도 고여사가 꿈에 그리던 캐나다의 풍경처럼 온통 새빨갛진 않았다. 듬성듬성 있는 단풍나무를 보니 한국의 공원도 이 정도는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린 단풍나무 아래에서 단풍잎을 모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가 단풍국에 왔었다'는 것을 사진으로 증명하듯.



공원 한쪽은 꽃을 심어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가을이라 꽃이 만발하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아직 피어 있는 꽃들이 있었다.


"어머 꽃 봐라 너무 예쁘다."


고여사가 꽃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행 내내 '멋지다, 멋지다'를 연발하면서도 그 좋은 풍경을 눈에만 담고 사진을 찍지 않던 고여사가, 꽃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역시 고여사는 꽃을 좋아해.


그러고 보니 여행 내내 요청이 없으면 딸 사진도 자발적으로 찍어주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고여사가 지겨워할 만큼 많이 찍어서 핸드폰이 고여사 얼굴로 꽉 찰 지경인데. 금지옥엽 딸은 색깔 고운 식물들에게 쨉도 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금지옥엽이 아니었나?


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다 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침 공원도 다 둘러봤겠다,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에어비앤비의 좋은 점은 현지인들이 사는 지역과 집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는 거다. 낙엽 쌓인 길을 걸으며 집집마다 취향껏 꾸며놓은 정원을 구경했다. 울타리가 없어서 마을이 넓고 쾌적해 보였다.


"마을이 너무 예쁘다. 나무도 많고."


"그치. 엄마, 우리 나중에 캐나다에 한 달 살기 하러 와보자. 일주일 갖고는 한참 부족하네."


"그러자. 한번 또 오지 뭐. 까짓 거."


가는 시간이 아쉬워, 또다시 먼 희망을 가져보았다. 여기에 진심으로 호응해주는 고여사가 참 좋았다.


발견하고, 먹어보고, 유유자적 산책하는 꼬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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