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출판

고생길은 시작됐다

by watabook

나는 출근 안 하면서 일하는 인간이다.

영세자영업자와 프리랜서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한다.

호칭도 다양하다. 작가님이나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고, 편집자님 아니면 번역가님이라고도 한다. 어느 날은 그냥 유정 씨다. 아뉴님이라고도 부른다.


아침 8시 반쯤 눈을 떠서 핸드폰으로 간밤의 소식을 확인하고, 허리가 아플 즈음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내키면 그 자리에서 오전 근무를 하다가, 점심을 대충 차려먹고 작업실이나 근처 카페로 가서 업무를 이어서 한다. 사실 밥 먹고 다시 침대에 누워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뒹굴거리는 날도 없지 않다. (사실 작년에는 좀 많았..)


이런 생활을 한 지 벌써 1년. 지난 3월 5일은 사업자를 낸 지 딱 1년 되는 날이었다.

그날 오전 부산에서 새벽 비행기 타고 올라온 저자님과 출판계약을 마쳤고, 저녁에는 눈여겨보던 분을 만나 마케팅 업무 협약을 맺었다. 몇 주 동안 일이 몰려서 정신없던 탓에 그날이 1주년인지 잊고 있었다가, 밤에 침대에 누워서 문득 생각났다. 오늘이 딱 일 년 되는 날이네.


많은 사람이 내게 왜 창업을 했는지 묻는다.


친한 사람이 물으면

"회사 다니기 싫어서."

별로 안 친한 사람이 물으면

"회사 밖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어서요. 혹시 저랑 책 내실래요???"

허허 웃으며 마무리한다. (보통 상대방은 이 질문을 들으면 창업에 대한 궁금증은 잊는다)


사실 이유는 많다. 그러나 그걸 다 말하자면 내가 회사에서 뭘 느꼈는지, 그전에 왜 출판계로 이직했는지, 그전에 성격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전에 어릴 적 꿈은 뭐였는지, 그것보다 대체 왜 태어났는지... 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적어도 10년 전부터 해서 2시간은 tmi를 연발해야 하고, 그걸 굳이 듣고 싶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테니.


나는 왜 이걸 시작했을까?


진짜 짧게 말하자면,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데 출판이 그에 적합했거나

출판일이 좋은데 마침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거나.


내 경우 이 두 가지 모두 정확히 해당된다.

좀 더 긴 버전은 이렇다.


(내가 경험한 세 개의 회사에서 느낀 개인적인 생각이다)



꼭 회사에서 일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

일을 하는 건 괜찮다. 오히려 일은 재밌다. 하지만 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일이 있든 없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할까? 일이 없으면 늦게 출근하고, 일을 빨리 끝내면 퇴근하면 안 되나?

일이 바쁠 때야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8시간은 무조건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없던 일을 만들고, 굳이 안 해도 되는 소모적인 작업을 하고, 일하는 척하면서 알트 탭을 눌러가며 쇼핑몰을 둘러보거나 게임방송을 보는 일도 생긴다.(... 게임방송은 실제로 목격했다. 그 직원은 내 시선을 의식하며 급히 알트 탭을 눌렀는데 또 다른 딴짓용 웹사이트가 팡 떠서 내가 예의상 눈길을 돌렸다고 한다)


맡은 업무가 확실하면 장소와 시간은 문제 되지 않는다. 노트북 들고 맘에 드는 카페에 가서 일할 수도 있고, 게임을 실컷 하다가 밤 11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일할 수도 있는 거니까. 9 to 6 혹은 몇 시에 출근하든 8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유연 근무제는 뭐가 됐든 회사에 8시간은 있으라는 말이다. 업무 자체가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에 근거한 이런 체계가 꼭 최선일까?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들다

함께 일하는 사람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사장님이 뽑으니까. 원수는 외나무다리가 아닌 회사에서 만나는 거라, 꼭 안 맞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성격이 잘 안 맞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인데, 문제는 성격이 안 맞으면 일 협조를 잘 안 하는 사람이 꼭 있다는 거다. 일할 때는 일과 개인적인 감정은 좀 분리시켰으면 하는데 꼭 이 둘을 분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반대 의견 하나 낼 때도 상대방 기분 상할까 봐 절절매고, 뭐 하나 더 해달라고 하고 싶은데 말을 말아버리고... 그러면 일이 잘될 리가 없다. 일의 최선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최선을 선택하게 된다. 나는 이거 정말 잘하고 싶은데, 그럼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근데 이렇게 고집부려서 저 사람이 기분이라도 상하면, 다음에 또 함께 일해야 하는데 그때는 더 힘들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결과물은 점점 산으로 갔다...



독자가 아닌, 결재라인을 생각하게 된다

책을 열심히 만들다가도 자꾸 잡념이 들었다.

'이 제목 안이 통과될 수 있을까? 사장님이 안 좋아할 텐데.'

'보도자료 이렇게 써도 되나? 팀장님이 깔 거 같은데'

어느 날부터 독자가 아닌 윗선에서 좋아할 만한 방향을 고민하면서 가능성을 하나씩 하나씩 접게 되었다. 맘 같아서는 '내가 다 책임질 테니 그냥 이렇게 가면 안 되냐?'고 묻고 싶지만, '그래서 책임을 어떻게 질 건데?'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회사가 아니라 최종 소비자에게서 판단받고 싶었다. 사장님 맘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독자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까였으면 했다. 사장님의 취향에 맞아서가 아니라 독자들이 좋아해서 성공했으면 했다. 어차피 윗선에서는 읽지도 않을 책인데 왜 그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만들어야 하나..?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바를 행하고, 잘못된다 해도 내가 책임지고 싶었다.



일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

일을 잘하는 게 어떤 건지는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다르다. 내 경우 체크리스트가 있는 게 아니라 포트폴리오를 보거나 함께 일을 해봤을 때 오는 느낌을 믿는 편인데, 그래서 거의 개인 취향에 가깝다. 물론 일하다 보면 이게 다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일단 협업하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일이 훨씬 더 잘 되어나간다.


회사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원치 않는 누군가와 함께 일해야 하는 때가 꼭 온다. 사원은 사원대로, 팀장은 팀장대로, 심지어 사장까지 모두가 '조직' 안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협업 관계가 계속 생긴다. 특히 협업이 많은 출판사 특성상 어떤 때는 드림팀이, 어떤 때는 일할 맛 안 나는 팀이 꾸려지기도 했다. (일할 맛 안 나는 팀은 어쩜 내가 문제였나.....) 어쩌면 이래서 사람들이 사내 정치를 하는 건가 싶었다. 원하는 환경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일만 하려고.

결과적으로, 어떤 식으로 팀을 꾸리고 어떻게 해나갈 건지 조직의 힘이나 상황이 아닌, 내가 통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믿음

사람들이 한 달에 책을 한 권도 안 읽고, 출판시장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출판사와 서점은 줄줄이 망하고... 맞다. 출판계가 정말 어려운 것 같긴 하다. 물론 출판을 20~30년 해온 분들은 그걸 낱낱이 체감하겠지만, 나는 책이 안 팔리는 게 디폴트인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고 책이 이렇게 안 팔리나 싶을 정도의 시기에 출판계에 입문했기 때문에 새삼스레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책의 대체제가 다양하게 등장하면서 예전보다는 판매량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산업 자체가 남아 있다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요즘 책을 사는 사람은 책 중의 한 권을 고르는 게 아니라, 넷플릭스, 공중파 예능, 스마트폰 게임, 유튜브 강의 중에서도 굳이 책을 선택해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이 다른 대체제보다 어떤 면에서는 낫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 사람의 취향이든, 컨텐츠 특성이든, 어떤 확실한 필요성이든. 그 포인트를 잡아서 책을 만든다면 적어도 손해는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책이 생각보다 더 안 팔리면 부족한 생활비는 알바를 해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구절절이 썼지만,

1인출판사 창업은 '회사 없는 삶'을 위한 내 첫걸음이다.

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가.

모두가 싫어하는 회사를 왜 모두 다니고 있는가.

혹시 대안이 있지 않을까?


이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실험이다.


사업을 하고 싶다->출판업은 어떨까?

이게 아니라

이 일이 좋다, 잘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을까?-> 원하는 삶의 방식과 사업을 꾸려가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극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먹고살기를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져도 어떤 사람은 프리랜서로만 일할 수도 있고, 회사에 말을 잘해서 재택근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1인출판사를 차리는 것을 대안으로 선택했다.


어쨌든 1년 동안 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의미 있는 행보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사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했다. 장기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스물다섯 살 때 막연히 꿈꿨던 삶의 방식을 거의 10년이 다 되어서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서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ㅎㅎㅎ 그건 또 다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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