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거점으로 출근했습니다
'한 달 동안 집과 작업실을 제공할 테니 개인 작업에 매진하라.'
강원작가의 방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내건 조건이었다.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럼 전혀 문제없었다. 정해진 곳에 매일 출근해 일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일요일 저녁, 어둑해지는 방 침대에 누워 네이버 지도앱을 켰다. 내 작업실로 배정된 공유 오피스 파도살롱은 집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천을 따라 걷다가 중간에 다리를 한번 건너면 되는 쉬운 코스. 매일 걸어다녀야지. 그리고 출퇴근 때 달라지는 풍경도 사진에 담아야지. 매일 어딘가 갈 곳이 생겼다는 생각에 조금 설렜다.
회사를 탈출한 지 3년. 매일 아침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돌아보면, 회사 다닐 때 출퇴근 자체는 괜찮았던 것 같다.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가끔은 신기한 사람들을 구경하며 매일 어디로 가는 경험. 운 좋게도 다녔던 회사들이 너무 멀지도 않고 지옥철 구간을 절묘하게 벗어나 크게 고생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매일 어디로 이동하는 건 뭔가 발견하고 경험할 수 있는, 생각보다 많은 영감을 주는 행위라는 걸 어딘가에 출근하지 않으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장 신났던 출근길은 3년 전 이맘때쯤 뉴욕에서였다. 당시 뉴욕에 있는 잡지사에서 한달 동안 일했다. 숙소는 맨해튼에서도 힙하다는 로워 이스트 사이드, 사무실은 메디슨 스퀘어 가든 근처 23번가. 아침마다 관광객이 아닌 출근하는 뉴요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출퇴근길이 쾌적하진 않았다. 뉴욕 지하철은 더럽기로 악명 높았다. 역사, 플랫폼, 선로, 열차, 의자 가릴 것 없이 더러웠다. 미국에 원인불명의 전염병이 돈다면, 분명 뉴욕의 지하철역이 그 근원지가 될 것이라 내심 생각했다. 에어컨도 잘 나오지 않는 지하철을 탄 사람들의 얼굴이 좀 피로해 보였다. 서울뿐 아니라 뉴욕 직장인들도 회사 다니는 건 그닥 신나지 않은가보구나. 말해 뭐해, 만국 공통이겠지.
그러나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본 팬시하고 시크하고 패뷸러스한 뉴욕이 아닌, 이런 퀘퀘한 지하철과 살짝 쩔어 있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서의 뉴욕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다음날 오후 2시, 편한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근처에 대학교도 있고 아파트 단지도 있는데,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도로와 인도는 잘 닦여 있었고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에는 푸릇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자연과 함께하는 매일 출퇴근길은 분명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만약 강릉에서 정해진 스케줄 없이 그날그날 할일을 정해야 한다면, 일주일도 못 견딜지 몰랐다.
25분 정도 걸어 파도살롱에 도착했다. 철문 앞에 '파도살롱'이라는 쓰여 있는 파란색 아크릴 입간판이 서 있었다. 상큼했다. 그런데 문득, 이름과는 달리 파도와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내에 있는데 이름을 왜 파도살롱으로 지었을까? 작명 프로세스에 대해 혼자 진지하게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파도는 웨이브고, 웨이브는 어떤 사조나 트렌드를 지칭하기도 하잖아. 뉴웨이브처럼. 혹은 타동사로 쓰면 뭔가를 흔든다는 뜻도 되고. 꼭 바다와 연결 짓지 않아도 이름에 '파도'가 들어갈 수 있지. 나의 고정관념을 반성하자(..)'
철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가니 업무 공간이 나타났다. 밖에서 본 허름한 철문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60평 정도 되는 널찍한 직사각형 공간에, 테이블 간 자리는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지 않아 쾌적해 보였다. 볕이 잘 드는 곳에 비치된 편안한 소파, 로컬 로스터리의 원두를 넣은 커피 머신, 간단한 문구류와 프린터기까지 업무에 필요한 웬만한 것들은 다 갖추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서가가 마음에 들었다. 로컬 라이프, 커뮤니티, 디자인, 브랜딩, 창업, 여행 관련해 읽을 만한 책이 많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신중하게 구성한 큐레이션이라 했다. 매주 6권씩 엄선한 하이라이트 책들은 '파도의 시선' 코너에 진열되었다. 재밌어 보이는 책이 가득 꽂힌 서가에서 책을 고르며 설레본 건 오랜만이었다. 오전에 한 권 골라 두 시간씩만 읽어도 꽤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책 만드느라 밀린 독서를 여기서 채우고 갈 수 있겠구나.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화병에는 꽃이 꽂혀 있고, 군데군데 놓인 초록색 화분들이 상큼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효율적이고, 정돈되어 있었다. 이런 공간은 처음에 인테리어에만 공 들인다고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매일 주의 깊게 살피며 조금씩 조정하고 또 조금씩 새로운 걸 채워넣고 뭔가를 빼야 최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이 정도면 공간 책임자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런 공간에서는 당연히 업무 효율이 높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파도살롱은 '지역에 새로운 물결을!'이라는 모토를 필두로 한 더웨이브컴퍼니의 젊은 직원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발랄한 바이브가 마음에 들었다. 공간을 활발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분위기 덕분이겠지.
지옥철 대신 시골길을 걸어 출근하고, 직장상사도 없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쾌적한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는 기분은, 몹시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