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기day3_금요일 오전, 해변으로 출근하는 길

오늘은 강문해변에서 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by watabook

금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예전엔 마감이 코앞인데 일이 잘 안 되면 제주도로 훌쩍 떠나곤 했다. 제주공항에 내려 애월로, 협재로, 김녕으로, 월정리로, 세화로... 마음 가는 대로 그날의 바다로 향했다. 제주도는 강릉보다도 더 해변마다 개성이 뚜렷했다. 그렇게 제주에서 1일 1바다를 하며 근처 카페에서 일하면 늘 기적처럼 마감을 맞출 수 있었다. 제주는 행운의 섬이었다.


올초 1월 코로나 직전 제주 곽지과물해변


강릉에 와서는 바다를 자주 못 봤다. 시내에서 고작 6~7킬로 떨어져 있지만 차가 없어서 선뜻 가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오늘은 꼭 바다를 보러 가야지. 카페에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면 완벽한 금요일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어느 해변으로 가느냐, 이것도 고민이다. 네이버 지도앱을 켰다. 안목해변에 좋은 카페가 많지만 사람이 많아서 일하기는 좀 번잡할 것 같고, 송정해변 근처엔 변변한 카페가 없고, 사천해변까진 좀 멀었다. 그렇다면 강문해변? 강문해변 스타벅스의 바다 뷰가 근사하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좋아, 강문해변으로 가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나로마트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몇 번의 경험상 목적지에 맞춰 버스를 골라 타기보다는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시내까지 가서 갈아타는 게 낫다. 그래서 아무 버스나 기다리고 있는데 운 좋게 강문해변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왔다. 신나서 버스에 탔다. 경포고등학교에서 내려서 2킬로미터 남짓 걸어가면 되는 코스였다.


날씨가 점점 흐려져 비가 올 것 같았다. 경포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렸다. 길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름 고등학교도 있어서 시내일 줄 알았는데, 완연한 시골 풍경이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강릉에서 나고 자란 웨이브컴퍼니 hani가 추천해준 이츠모라멘에 가서 뜨끈한 돈코츠 라멘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앞에 대지서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언젠가 한번 들은 적 있었는데, 저기가 그곳이구나. 우산을 접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사람 좋아 보이는 사장님이 맞아주었다. 둘러보니 읽을 만한 책이 많았다. 신간과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 두 권을 골라 카운터로 갔다. 사장님과 가벼운 인사로 시작했다가 책 이야기, 출판시장 이야기, 인터파크 송인서적(책 도매 업체) 부도 걱정, 강릉살이, 자식 이야기, 비혼 트렌드까지 수다를 떨다가 어느새 40분이 지나 있음을 발견했다. 재밌었지만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파서, 다음에 또 오겠다 인사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 코너에서 한 권 구매


중간에 시골집도 지나치고 길고양이도 만나고 예쁜 카페들도 보았다. 비가 와서 더 운치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이츠모라멘에 도착해 돈코츠라멘을 시켰다. 진하고 고소한 국물에 탱탱한 면발이 어우러져 맛있었고, 무엇보다 약간 쌀쌀했는데 뜨끈한 국물을 마시니 살 것 같았다.


이 구역 유명 카페 애시당초
비 오는 날에는 이츠모 라멘으로 오세요


다 먹고 또다시 길을 걸어 드디어 강문해변에 도착했다. 스타벅스에 들어가 3층에 자리 잡았다. 창 너머로 파도가 아주 높게 치는 바다가 보였다. 사람들이 전부 바다 쪽을 보고 앉아 있었다. 나도 바다가 내다보이는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강문해변 스타벅스 3층에서 보는 뷰


높은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진짜 좋다.’


이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지금 내 삶에 거의 완벽히 만족했다. 내가 꿈꿔온 이상에 가까웠다. 내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는 삶. 한달을 계획하고 왔어도 좋으면 두달로 망설임 없이 연장할 수 있는 삶. 10년 전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돌고 돌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현재에 만족하는 만큼 불안감도 커져갔다.


그러니까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지금은 출판과 외주 프로젝트 사이에서 균형을 그럭저럭 잡으며 나아가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사는 게 가능할까? 혹시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짧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창업한 사람들을 보통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한다. 나는 지금이 아닌 오히려 회사 다닐 때 전력질주를 했다. 그때까진 뭔가를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모르고 살았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어떤 상사가 말했다. "유정씨는 이마에 '열심'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아요.” 그때 내가 매사에 좀 과하게 열심히 하나보다, 하고 깨달았다.


열심히 하지 않기 시작한 건, 역설적으로 개인사업자를 내고부터다. 회사생활에 번아웃이 온 건지,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본질적인 회의가 생겼기 때문이다. 죽기살기로 해서 사업이 잘되고 돈 많이 벌면 뭐할 건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지금 이 순간 전부가 인생의 일부고, 즐거운 일을 놓치기 시작하면 그 자체가 인생이 된다. 나는 이 모든 순간을 즐기며 가고 싶었다. 가늘고, 길게. 따라서 일이 바쁘고 마감이 닥쳐도 일단 재밌는 제안이 오면 그걸 먼저 했다. 친구가 놀자고 하면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책 마감 직전엔 베트남 여행도 다녀왔다.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잠시 멈추고 반려묘와 놀았다.


누가 “창업하고 잠도 못 자고 죽어라 했는데도 실패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속으로 '어쩌면 죽어라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리 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여지를 남겨두었으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건강을 챙기고, 주변을 살피며 생각지 못했던 기회도 잡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았다면 또 다른 돌파구를 찾지 않았을까. 인생은 마라톤이고, 진짜 기회는 한참 있어야 나타날 수도 있으므로. 결국엔 버티는 게 핵심이므로.


대지서점 사장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서점을 오랫동안 하면서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서점을 접는 건 생각도 못하겠다고 하셨다. 부동산에서는 공간을 카페로 내주고 월세를 받지, 왜 돈도 안 되는 서점을 하느냐고 종종 연락이 온다고 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런 삶이 좋다고 했다. 큰 욕심 없이 좋아하는 책을 맘껏 읽고, 손님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책을 추천해주며 소소하게 돈을 버는 삶. 큰돈을 벌기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삶.


나도 그런 것 같다. 전력질주보다는 인터벌 달리기처럼 사는 게 내 성향에 맞는 것 같다. 우리 저자들이 책을 냈을 땐 함께 전력질주하고, 그 밖의 시간엔 숨을 고르면서 이런저런 기회를 모색하며 시야를 넓히고 천천히 가는 삶이 좋다. 정면만 보고 막 뛰기에는 삶에는 그게 전부가 아니므로.


물론 이걸 유지하는 것도 다른 의미에서 쉽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