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강문해변에서 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금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문득 바다가 보고 싶었다.
예전엔 마감이 코앞인데 일이 잘 안 되면 제주도로 훌쩍 떠나곤 했다. 제주공항에 내려 애월로, 협재로, 김녕으로, 월정리로, 세화로... 마음 가는 대로 그날의 바다로 향했다. 제주도는 강릉보다도 더 해변마다 개성이 뚜렷했다. 그렇게 제주에서 1일 1바다를 하며 근처 카페에서 일하면 늘 기적처럼 마감을 맞출 수 있었다. 제주는 행운의 섬이었다.
강릉에 와서는 바다를 자주 못 봤다. 시내에서 고작 6~7킬로 떨어져 있지만 차가 없어서 선뜻 가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오늘은 꼭 바다를 보러 가야지. 카페에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면 완벽한 금요일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어느 해변으로 가느냐, 이것도 고민이다. 네이버 지도앱을 켰다. 안목해변에 좋은 카페가 많지만 사람이 많아서 일하기는 좀 번잡할 것 같고, 송정해변 근처엔 변변한 카페가 없고, 사천해변까진 좀 멀었다. 그렇다면 강문해변? 강문해변 스타벅스의 바다 뷰가 근사하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좋아, 강문해변으로 가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나로마트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몇 번의 경험상 목적지에 맞춰 버스를 골라 타기보다는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시내까지 가서 갈아타는 게 낫다. 그래서 아무 버스나 기다리고 있는데 운 좋게 강문해변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왔다. 신나서 버스에 탔다. 경포고등학교에서 내려서 2킬로미터 남짓 걸어가면 되는 코스였다.
날씨가 점점 흐려져 비가 올 것 같았다. 경포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렸다. 길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름 고등학교도 있어서 시내일 줄 알았는데, 완연한 시골 풍경이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강릉에서 나고 자란 웨이브컴퍼니 hani가 추천해준 이츠모라멘에 가서 뜨끈한 돈코츠 라멘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 앞에 대지서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언젠가 한번 들은 적 있었는데, 저기가 그곳이구나. 우산을 접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사람 좋아 보이는 사장님이 맞아주었다. 둘러보니 읽을 만한 책이 많았다. 신간과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 두 권을 골라 카운터로 갔다. 사장님과 가벼운 인사로 시작했다가 책 이야기, 출판시장 이야기, 인터파크 송인서적(책 도매 업체) 부도 걱정, 강릉살이, 자식 이야기, 비혼 트렌드까지 수다를 떨다가 어느새 40분이 지나 있음을 발견했다. 재밌었지만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파서, 다음에 또 오겠다 인사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중간에 시골집도 지나치고 길고양이도 만나고 예쁜 카페들도 보았다. 비가 와서 더 운치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이츠모라멘에 도착해 돈코츠라멘을 시켰다. 진하고 고소한 국물에 탱탱한 면발이 어우러져 맛있었고, 무엇보다 약간 쌀쌀했는데 뜨끈한 국물을 마시니 살 것 같았다.
다 먹고 또다시 길을 걸어 드디어 강문해변에 도착했다. 스타벅스에 들어가 3층에 자리 잡았다. 창 너머로 파도가 아주 높게 치는 바다가 보였다. 사람들이 전부 바다 쪽을 보고 앉아 있었다. 나도 바다가 내다보이는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높은 파도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진짜 좋다.’
이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지금 내 삶에 거의 완벽히 만족했다. 내가 꿈꿔온 이상에 가까웠다. 내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는 삶. 한달을 계획하고 왔어도 좋으면 두달로 망설임 없이 연장할 수 있는 삶. 10년 전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돌고 돌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현재에 만족하는 만큼 불안감도 커져갔다.
그러니까 '평생 이렇게 살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지금은 출판과 외주 프로젝트 사이에서 균형을 그럭저럭 잡으며 나아가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사는 게 가능할까? 혹시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짧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창업한 사람들을 보통 처음부터 전력질주를 한다. 나는 지금이 아닌 오히려 회사 다닐 때 전력질주를 했다. 그때까진 뭔가를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모르고 살았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어떤 상사가 말했다. "유정씨는 이마에 '열심'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아요.” 그때 내가 매사에 좀 과하게 열심히 하나보다, 하고 깨달았다.
열심히 하지 않기 시작한 건, 역설적으로 개인사업자를 내고부터다. 회사생활에 번아웃이 온 건지,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본질적인 회의가 생겼기 때문이다. 죽기살기로 해서 사업이 잘되고 돈 많이 벌면 뭐할 건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지금 이 순간 전부가 인생의 일부고, 즐거운 일을 놓치기 시작하면 그 자체가 인생이 된다. 나는 이 모든 순간을 즐기며 가고 싶었다. 가늘고, 길게. 따라서 일이 바쁘고 마감이 닥쳐도 일단 재밌는 제안이 오면 그걸 먼저 했다. 친구가 놀자고 하면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책 마감 직전엔 베트남 여행도 다녀왔다.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잠시 멈추고 반려묘와 놀았다.
누가 “창업하고 잠도 못 자고 죽어라 했는데도 실패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속으로 '어쩌면 죽어라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리 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여지를 남겨두었으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건강을 챙기고, 주변을 살피며 생각지 못했던 기회도 잡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았다면 또 다른 돌파구를 찾지 않았을까. 인생은 마라톤이고, 진짜 기회는 한참 있어야 나타날 수도 있으므로. 결국엔 버티는 게 핵심이므로.
대지서점 사장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서점을 오랫동안 하면서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서점을 접는 건 생각도 못하겠다고 하셨다. 부동산에서는 공간을 카페로 내주고 월세를 받지, 왜 돈도 안 되는 서점을 하느냐고 종종 연락이 온다고 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이런 삶이 좋다고 했다. 큰 욕심 없이 좋아하는 책을 맘껏 읽고, 손님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책을 추천해주며 소소하게 돈을 버는 삶. 큰돈을 벌기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삶.
나도 그런 것 같다. 전력질주보다는 인터벌 달리기처럼 사는 게 내 성향에 맞는 것 같다. 우리 저자들이 책을 냈을 땐 함께 전력질주하고, 그 밖의 시간엔 숨을 고르면서 이런저런 기회를 모색하며 시야를 넓히고 천천히 가는 삶이 좋다. 정면만 보고 막 뛰기에는 삶에는 그게 전부가 아니므로.
물론 이걸 유지하는 것도 다른 의미에서 쉽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