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기day7_두 여자의 거침없는 강릉여행

함께 천방지축으로 나이들어가는 기쁨

by watabook

오래 만나 친해지는 사이가 있고, 단번에 서로를 알아보고 친해지는 사이도 있다. 서른 살 넘어서는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2017년 1월, 한 독서모임에서 P를 만났다. P는 한 시간쯤 늦게 도착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앉았다. 이미 모두가 자기소개를 끝난 시간. 모임장이 P를 불러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사람들 앞에 선 P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한 대기업을 7년 다니다 퇴사했고요, 현재 목표는 백수 생활을 최대한 오래 지속하는 겁니다."


와우. 예쁘게만 생긴 줄 알았는데 은근히 강단 있는 스타일인가보다. 그녀가 궁금해졌다. 뒤풀이 자리에서 그녀 옆에 앉았다.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 동갑이고,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웠고, 그밖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핵심 공통점은 음악과 페스티벌이었다. 페스티벌 성애자인 나 못지 않게 많은 페스티벌에 다닌 P. 우린 서로를 모르던 시절부터 너무 많은 비슷한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약간 과하게 '맞아, 나도'를 연발한 건 인정하지만, 공통점이 많은 건 확실했다. 우린 번호를 주고받았다. 그날 뒤풀이 자리에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새벽산행 모임이 있어 일찍 일어나야 했다.


"반가웠어요 P, 다음 모임에서 봐요!"

"네, 산행 잘 다녀와요."


그러고 P는 이후 독서모임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고로, P와의 관계는 한번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늘게 연락을 이어가며 가끔 만났고, 나중엔 내 대학 동창이 P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걸 알게 돼 따로 또 같이 종종 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좁은 건 알지만 매번 놀랍다)



P가 강릉에 놀러왔다. 딱 8시간 있다 돌아가는 일정이라 쏘카를 빌렸다. 보통 성수기 전에는 사설 렌터카 업체들이 매우 저렴하게 차를 빌려준다. 업체마다 다르겠지만, 강릉에서 성수기 전 평일에는 12000원이면 모닝을 12시간 렌트할 수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강릉 렌터카를 치면 티몬과 연계된 몇몇 업체가 나온다. 하루에 만원꼴이라니! 조수석에 P를 태우고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메뉴는 무더워진 날씨에 걸맞은 초계국수. 우리의 목적지 오월에초당은 강릉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초계국수 맛집 오월에초당


도착해서 아담한 정원을 지나 식당에 들어섰다. 간판에 허영만의 식객 '국수편'에 나온 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네. 안쪽 테이블에 앉아 초계국수와 멸치국수를 시켰다. 멸치국수도 맛있었지만, 초계국수가 일품이었다. 국물이 새콤하고 시원하고 혀에 착착 감겼다. 면발도 쫄깃했다. 새콤하고 시원한 게, 없던 입맛도 돋을 만했다.


3년 전 독서모임에서 본 그 P와 강릉에서, 이 화창한 날에, 시원한 국수를 먹다니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기분 좋으니까 계산은 내가 해야지. P의 성격상 자기가 내겠다고 할 것이므로, P보다 내가 먼저 계산대로 가야 했다. 정신없이 급히 일어나서 계산대로 가려는데, 발목이 뭔가에 걸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거 넘어지겠는데? 어떡하지?' 넘어지는 순간,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넘어지지 않을 방도가 전혀 없을까? 진짜 여기서 넘어져야만 하는가? ’


0.3초간 머리를 굴린 결과 넘어지는 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옆으로 추하게, 그것도 팔을 휘저으며 시끄럽게 넘어졌다. 식당이 고요해졌다.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면 내가 너무 부끄럽잖아요. 아픈 동시에 너무 창피하고 웃겼다. 또 다시 머리를 빨리 굴려, 미친년처럼 웃기 시작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남자 알바생이 밴드를 들고 다가와서 손수 밴드를 붙여주...는 줄 알았는데, 테이블에 밴드를 탁 놓고 계산대로 돌아갔다.


나름 쿨한 배려인건 알겠다. 근데 예전에는 넘어지면 모른척하고 가주는 게 고마웠는데 요샌 넘어지거나 어디에 부딪히면 누가 괜찮냐고 물어보고 신경써줬으면 한다. (실제로 몇 개월 전 베스킨라빈스 가게 유리가 너무 깨끗해서 문이 열려 있는 줄 돌진하다 머리를 심하게 박았다. 머리를 감싸쥐고 앉아 있는 날 보며 알바생들이 119 불러야 하나 수근댄거 같은데, 막상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진 않아서 속상했다. 물론 멀쩡은 했다.) 나이 들어서 그런가... 여튼 부러지거나 부서진 곳은 없으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P는 소원대로 내가 계산하게 가만 두었다. 휴. 울 뻔했네.


우리는 식당을 나와 송정해변 테라로사에서 커피를 마시고, 사천해변으로 이동해 카페 카모메로 자리를 옮겨 커피를 두 잔째 마셨다. 카페 카모메는 2012년에 처음 방문한 곳이다. 당시만 해도 사천해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카페가 해변에 들어선 유일한 카페인 것으로 기억한다. 카페의 쇼파 좌석 창밖으로 바다가 내다보였다.


이것은 천국의 색감


그로부터 5년 후 겨울, 지인들과 오대산 산행 후 바다를 보러 왔다가 이 카페에 앉아 펑펑 오는 눈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우린 아늑한 실내에서 쓸쓸해보이는 겨울 바다와 함박눈을 쳐다보며 차를 마시고 놀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또 같은 자리에서 P와 커피를 놓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름을 맞은 창밖 테라스에는 작은 테이블에 노란색 비치 파라솔이 꽂혀 있었다. 청록색 바다와 아주 잘 어우러졌다.


3년 전 겨울 눈 펑펑 오던 날, 카페 카모메에서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난 스물 여덟이었고, 지금은 서른 여섯이 되었다. 이곳도, 나도 똑같은 것 같은데 시간만 가고 나이만 먹은 것 같아 잠시 시무룩해졌다. 하긴, 돌아보면 꼭 그런 건 아니다. 8년 동안 많은 사건이 있었고 내 인생도 상상도 못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땐 미래에 대해 갈피를 못 잡던 대학원생이었는데, 8년 후 난 강릉에서 내키는 만큼 머물면서 일하고 돈도 벌고 있다. 스물 여덟의 내가 이 미래를 엿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 흡족해했을 것이다.


'오호 미래의 나, 아주 잘하고 있어.'


완벽히 만족하는 삶도 아니고, 계획을 다 이루지도 못했다. 그러나 결국 내게 최적의 삶으로 점점 가까워져가는 중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렇게 되고 있다.


*아, 그리고 P는 2020년 7월 기준으로 여전히 백수다. 그녀의 멋진 인생에 치얼스-



오늘의 음악

Weezer-Island in the 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