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기day6_퇴근 후 아무것도 안하는데요

강박적인 취미생활도 회사생활 스트레스의 연장이었던 것을

by watabook

오후 여섯시 반. 일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먼저 들어가볼게요."


퇴근길은 출근길보다 신난다. 저녁땐 그리 덥지 않아서 남대천길을 따라 집에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대천은 대관령 근처 오봉저수지에서 시작해서 관동대학교 근처 우리 집을 지나 강릉 시내를 가로질러 동해바다로 흘러나간다. 꽤 긴 천인 셈이다.


퇴근길은 이렇다. 파도살롱에서 나와 길을 건너, 6월을 맞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길을 따라 한 150미터 걷는다. 그러면 내곡교가 나온다. 작은 차도를 한번 건넌다. 이제 결정이 필요하다. 깔끔한 길로 가고 싶으면 여기에서 내곡교를 건넌 다음에 천 길로 내려가고, 조금 투박하지만 나중에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는 길로 가려면 여기서 내려가면 된다.


수많은 장미 중 내 장미로 찍어놓고 매일 출근길 인사했던 아이


오늘은 전자를 선택했다. 내곡교를 건너며 멀리 보이는 풍경을 감상했다. 천이 끝없이 뻗어 있고 저 멀리 산이 보였다. 쨍한 날에는 푸른 산이 선명히 보이고 습한 날에는 산에 등성이에 흐린 구름이 껴 있었다. 해질녁에는 흐르는 물 표면에 햇볕이 반짝반짝 반사된다. 천을 따라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산과 석양이 어우러져 전망이 정말 근사했다.


해질녘 남대천을 따라 걷는 길


쉼 없이 걸어오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걸었다. 사람들은 혼자 걷거나 둘이 걷거나 강아지와 걷거나 혹은 혼자 뛴다. 길가 정자에서 쉬는 사람들, 운동 기구에서 허리를 돌리고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 동네 홍제천에서도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여기서 보니 조금 새로워 보였다.


만약 아까 내곡교를 건너지 않고 바로 내려온 상태라면, 1킬로미터 남짓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게 된다. 가물 때는 천이 거의 말라 있어 징검다리 건너기 난이도가 최하이지만, 비온 후에는 징검다리 표면까지 물이 찰랑찰랑해서 좀 무섭다. 물론 비가 많이 오면 징검다리가 침수돼 건널 수 없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이 돌 세 개 앞까지 오면 가만히 멈춰 먼저 가도록 기다린다.


퇴근길의 하이라이트, 징검다리


징검다리까지 건너면 거의 다 왔다. 차도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면 아파트 단지가 나오고, 5분만 걸어가면 집에 도착한다. 도착해서는 쌀을 씻어 엄마가 해준 반찬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한다. 적당히 방 정리를 한다.

자 이제 뭘 할까?


별일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루미큐브 게임을 하거나 가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 그러다 씻고 불을 끄고 잔다. 알람은 맞추지 않는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정확히는 회사원일 땐 퇴근 후 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했다. 스물다섯 살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다. 청춘이 아까우니 기를 쓰고 놀고, 세상은 만만치 않으니 자기계발도 열심히 했다. 퇴근 후 회사 사람들이나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셨고, 주말에는 스터디와 인맥 쌓기에 매진했다.(물론 돌아보면 의미 있는 인맥은 없었다)


그리고 각종 취미생활을 섭렵했다. 회사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것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마치 스펙처럼 생각한 게 아닌가 한다. 교양 있어 보이려고, 체력 증진을 위해, 미래가 불안하니까 게임 캐릭터 능력치 높이듯 분투했던 것 같다. 분야도 다양했다. 요가, 클라이밍, 발레, 독서모임, 영어회화 스터디, 서핑, 밴드 활동, 락페 참여, 페스티벌 자원봉사, 공연 관람, 우쿨렐레, 카혼, 스윙, 탱고를 배웠다. 심지어 한동안은 출근 전 매일 등산하거나 중국어 학원을 다녔다. 출근 전에 뭔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면 그 날은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백산 겨울산행. 앞에서 발길질하는 22년 지기 지인


물론 재미는 있었다. 관심사가 다양하고 새로운 걸 워낙 좋아했으므로.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순수한 재미와 설렘에서 '나는 이러이러한 것도 하는 사람이야'라는 약간의 허세로, 나중에는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증상으로 심화됐다.


이러한 생산성에 대한 강박이 사라진 건 마지막 퇴사 이후다. 1인출판사 운영과 프리랜서를 겸하면서 삶의 중심은 회사가 아니라 내가 되었다. 아침에 알람 소리가 아닌 밝은 햇살에 잠을 깼고,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일을 내일로 미뤘다. 무엇보다 상사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나의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어디서든 인정받고 예쁨받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상사 눈치를 보며 나를 갈아넣었던 것 같다.


이제 생활은 단순해졌고, 비로소 기를 쓰고 뭔가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어딘가에 매여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충만해졌으니. 사람들을 만나 떠들썩하게 놀지 않아도, 뭔가 강박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다.


가장 싫어하는 것을 인생에서 치워버린 후 비로소 마음이 고요해졌다. 다행이었다. 인생을 싫어하지 않아도 되어서. 일 끝내고 해변에서 파도 소리 들으며 회 한 접시, 맥주 한 캔으로 넉넉해지는 마음. 서울에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더 커리어를 쌓을지, 얼마나 중요한 사람과 인맥을 쌓고 능력치를 키울지에 대해 별로 없어졌다. 용기를 내어 회사를 놓지 못했다면 누릴 수 없었을 마음의 평화랄까.


이제 집에 와서는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꼭 생산을 해야만 의미 있는 인간이 아니므로. 그저 주변 풍경을 누리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럼 그날의 미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