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바다의 진정한 풍류를 즐기다 골로 갈 뻔 했습니다
2015년부터 매해 강원도에 오고 있다. 시작은 서핑이었다. 친구 한 명이 5월 초 연휴에 양양에 서핑하러 간다고 단톡방에 밝힌 순간, 순식간에 서핑 원정대가 결성되었다. 서핑이라. 원정대에 속한 다섯 명은 서핑 경험이 한번도 없었다. 그냥 바다에서 서핑인가 뭔가 하고 좀 놀다가, 해가 지면 술이나 마시고 놀고 싶은 게 분명했다.
첫 서핑은 짜릿했다. 5월 초, 해변은 이미 뜨겁고 바다는 아직 차가울 때였다. 서핑을 원없이 즐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를 원없이 즐겼다. 바다에 빠지고 입으로, 코로, 귀로 바닷물을 흡입했다. 아무렴 어떠랴. 바다에서 실컷 놀다가 밤에는 고기를 굽고, 1인당 1병씩 와인을 마셨다(건강했던 시절이다).
그해 이후,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양양으로 서핑을 갔다. 현재는 목욕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람이 북적이는 죽도나 인구해변이 아닌 약간 한적한 동산해변에서 여유롭게 서핑을 즐겼다. 매해 갔지만 모두가 1년 만에 리셋되는지 실력은 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 해와 같이 강습을 받고 대충 여러번 바다에 빠지면서 타다가, 밤이면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음악에 맞춰 미친것들처럼 춤을 추고 놀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20년, 오늘은 혼자 나섰다. 혼밥에 혼술, 혼자 서핑을 못할 건 뭐람? 목적지는 강릉 사근진해변에 있는 한 서핑숍. 강릉은 양양만큼은 아니지만 서핑숍이 군데군데 있다. 집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강릉은 버스도 자주 안 오지만 배차 시간표가 놀랍도록 맞지 않는다. 배차 간격이 기본 30분 이상인 버스들이 배차 시간까지 맞춰 오지 않으면 답답해 죽는다.
그러나 오늘은 운이 좋았다. 정류장에 나가자마자 버스가 금방 와서 중앙시장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경포해변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강릉 다운타운에는 은행과 관공서 등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지만, 조금만 동쪽으로 달리면 이내 시골길이 나타난다. 동쪽으로 달리던 버스가 어느새 경포해변 앞에서 멈춰섰다. 내려서 보인 경찰서가 정겹게 느껴졌다. 경찰서가 정겹게 느껴지다니, 여지껏 잘 살아왔나보다.
경찰서를 지나 사근진해변까지는 1킬로미터 정도. 강릉인의 관점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시기는 6월 말, 성수기가 슬슬 시작될 타이밍이었다. 들뜬 표정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거리를 즐겁게 걸어다녔다. 사근진해변으로 향하는 길 오른편에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높은 파도가 철썩철썩 밀려들어왔다. 파란 하늘 아래 그것보다 더 푸른 바다, 해변으로 부서져 밀려드는 하얀 거품처럼 여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사근진해변 가는 길가에는 건어물 가게, 편의점, 테이크아웃 커피숍들이 늘어서 있었다. 휘황찬란한 횟집이 늘어서 있는 경포해변이나 고급스러운 카페들이 있는 안목해변과 강문해변과 달리, 사근진해변으로 가는 길에는 볼품없는 작은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다. 작은 건어물 가게들과 편의점, 밥집, 그리고 중간중간 폐업한 가게도 보였다.
사근진 해변에 도착해 근처 서핑숍으로 갔다. 이십 대 후반쯤 되는 직원이 웃으며 반겼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보드랑 슈트 렌탈할 수 있나요?"
"강습은 안 들으시고요?"
"네, 렌탈만요."
낑낑대며 웨트슈트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나갔다. 보드는 해변 아래 천막에서 달라고 하면 준다고 했다. 뜨거운 아스팔트길을 건너 해변에 도착했다. 보드를 들고 바다에 들어섰다. 그런데 파도가 왜 이렇게 센 거지? 윈드파인더 앱으로 보니 파도가 0.8~0.9미터였다. 양양 바다에서 파도가 장판일 때나 타봤지, 이런 높은 파도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난 호기로웠다. 뭘 몰랐으므로(..)
'이 정도쯤이야 뭐.'
대자연의 힘은 엄청났다.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고, 파도는 그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컸다. 바다 쪽으로 패들링하면 바람 때문에 오른쪽으로 계속 밀려났다. 애써 몸을 돌려 다시 패들링하며 보드에 서려고 할 때마다 가볍게 쓰러져 바다로 고꾸라졌다. 그렇게 두 번만 패딜링+업 자세(라고 생각했지만 엉거주춤 엉덩이를 뺀 자세)를 취하는 시늉을 하면 이미 해변으로 밀려나 있었고, 거센 파도는 마무리로 나를 모래밭에 내리꽂았다. 내가 연약해서가 아니다. 플라밍고 튜브를 타고 놀던 몸 좋은 젊은이도 거센 파도에 밀려 모래사장으로 가볍게 내팽개쳐졌다.
그래도 4만원이 아까워서 바다와 사투를 벌이다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되겠구나' 싶었다. <노인과 바다> 찍는 것도 아니고, 그만 접자. 보드를 들고 반납하러 걸어갔다. 그때 하필 맞바람이 불었다. 태풍 뉴스 속보 장면처럼 고개를 숙이고 초속 1센티로 걸어가다가 2초씩 공중부양하고 뒤로 밀리길 수십 회. 드디어 보드를 반납하는 데 성공했다. 해변에 대자로 누웠다.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
놀다가 지쳐 엄마를 찾는 삼십대 중반이라니.
서핑숍으로 돌아오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완전히 녹초 상태였다.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니 무척 개운했다. 뽀송뽀송해진 몸으로 카운터에 장비를 반납했다. 기를 쓰고 4만원어치를 즐긴 내가 장했다. 그러면 당연히 상을 줘야지.
"생맥주 한잔 주세요."
맥주 한잔을 들고 앞마당 캠핑의자에 앉았다. 멀리서 바라본 바다는 평화로웠다. 그래, 넌 멀리서 봐야 예쁘다. 생맥주 한잔에 몸이 노곤해졌다. 마당 인조잔디 위에서 놀던 강아지가 달려왔다. 한 손으론 강아지를 쓰다듬고 한 손으로는 맥주컵을 잡고 마셨다. 진정한 이너피스는 바로 이곳에 있었다.
강릉은 역시 단짠단짠 최고 맛집이다.
오늘의 음악
Radiohead-High and D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