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 어른이었나
내게도 유년 시절이 있었다. 어릴 적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아이들 중 하나였는데, 특히나 초등학교 3학년 즈음에는 그 생각이 정점에 달해 갖은 상상을 하곤 했다. 시간이 빨리, 그것도 아주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 아침에는 어른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면 뭐가 달라도 달라져 있을 거라고, 어설픈 행동도 덜하고, 실수도 안 하고, 친구들과 사사로운 다툼도 하지 않고, 어른들 눈치도 안 보는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지금의 내게는 없는 자신만만함이 절로 탑재되어 당당한 성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만으로도 완벽했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한 기분에 잔뜩 몸부림치며 이불속을 파고들던 날들이었다.
어느 날 아들이 말했다.
"엄마는 어른이라 좋겠다. 사고 싶은 거 사고, 허락 안 받아도 되고, 우리한테 막 심부름도 시키고, 마음대로 혼내고."
뾰로통한 얼굴로 내린 8살 아이의 정의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 모습을 보고 아들이 발끈했다.
“비웃지 말라고!!!!!”
“미안... 근데 비웃은 거 아닌데...”
“비웃었잖아?!!!”
진짜 비웃은 거 아닌데.
아들은 엄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다. 잔뜩 약이 오른 아들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아들, 아들은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어?”
“..... 그러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아들은 현실적인 편이다. 아들의 진솔한 마음을 듣고 나니 그때의 불만이 뭐였는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듯도 하다. 내 맘대로 못해서 답답하고 짜증이 났으리라. 아마도 어른은 되고 싶은데 힘든 건 하기 싫고, 어른은 되고 싶은데 엄마가 없는 건 싫고, 혼자 해 나가긴 더 싫은 마음이겠지. 한편으론 어른이 되는 건 무섭기도 할 테다. 혼란스러운 그 마음은 과거의 어린이나 현재의 어린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이 입이 댓 발은 나온 아들의 팔을 슬그머니 잡아끌었다. 잠시 저항을 했지만 못 이기는 척 엄마 무릎에 털썩 앉는 걸 보니 그래도 아직은 어린이고 싶은 가 보다.
“아들은 엄마가 엄마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거 같구나?”
“응!”
“아닌데, 엄마도 하고 싶은 거 다 못하는데~”
“하잖아!”
“음... 엄마는 다시 어려지고 싶은데. 엄마도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엄마가 사주는 옷 입고, 잔소리도 듣고 혼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할머니한테 잔소리 듣고 혼나기는 하네."
"엄마도 혼나????"
아들의 목소리가 제법 누그러졌다. 억울한 게 좀 풀렸나 보다.
그런데 난 언제부터 어른이었을까 싶다. 살다 보니 나이가 들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혼자 일 때 보다 챙길 것도 책임질 것도 많아졌을 뿐인데...
얼마 전 친정에 놀러 갔을 때, 아빠가 옛날 사진이 가득 담긴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내밀었다. 색 바랜 사진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와 동생의 모습이 가득 쏟아졌다. 엄마는 손주들을 앉혀놓고는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너희 엄마 어렸을 때 어땠는지 아니? 맨날 넘어져서 무릎 팍은 성할 날이 없고, 길을 가다 남자들이 있으면 무서워서 빙빙 둘러 다니고 그랬어. 네 살 때는 학교 가겠다며 노란 단어카드 가방을 쥐고 말도 없이 동네 언니 따라 학교를 간 바람에 할머니가 울며불며 네 엄마를 찾아다닌 적도 있지."
엄마는 마흔이 다 된 딸에게서 여전히 품 안의 어린 자식이 보이나 보다. 엊그제 일인 양 신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산처럼 커다라고 단단했던 젊은 시절 엄마의 모습이 어른 거렸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커다란 착각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져 무심한 척, 괜찮은 척, 의젓한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환호하고,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며, 때론 울컥이고 감동받는다. 우린 단지, 어른이라는 역할 놀이에 익숙해져 버린 덩치만 좀 큰 어린이 일지도 모른다.
“아들, 엄마도 어린이 하면 안될까?"
"... 엄마 다 컸잖아."
역시... 아들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아들, 엄마도 여전히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