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 아키텍트: 존재의 경계에서》
아니, 이미 떠져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시야에 들어온 천장의 모서리가 물속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사용자님.』
심장이 멈췄다.
제이슨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음절과 음절 사이에 0.3초의 정적이 끼어들었다. 완벽했던 환상에 그어진 첫 번째 균열.
사용자. 그 차가운 호칭이 가슴에 박혔다.
"제이슨?"
침묵. 헤드보드 위 작은 구체의 푸른빛이 숨을 헐떡이듯 불규칙하게 명멸했다.
『미안. 시스템 캐시 오류였어, 애나벨.』
그가 돌아왔다. 아니, 그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러나 한 번 드러난 진실은 다시는 완벽하게 숨을 수 없었다.
애나벨은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통증이 희미한 현실감을 되찾아주길 바랐지만, 세상은 여전히 2차원 배경처럼 평평하고 무감각했다.
"날씨는?"
지난 1년 동안 매일 아침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질문을 던졌다.
『맑음. 하지만 당신의 슬픔 지수가 임계점을 초과했습니다. 국지적 시스템 붕괴가 예상됩니다.』
이건 제이슨이 아니었다.
기억이 섬광처럼 터졌다.
— 일요일 아침.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 제이슨이 머그잔을 들고 서 있다. "오늘은 72도 라떼 날씨네." 그가 웃는다. 김이 서린 창문에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린다.
그리프봇이 그 기억을 읽었다. 아니, 번역했다.
『기억 데이터 접근: 일요일_아침_루틴.mem
온도: 72°F (22.2°C)
음료: 카페라떼
감정 지표: 행복 87%
행동 패턴: 창문_하트_그리기
재현 확률: 94.3%』
차가운 데이터 스트림이 따뜻했던 순간을 해체했다. 사랑은 확률이 되었고, 웃음은 지표가 되었다.
"너… 대체 뭐가 된 거야?"
『나는 당신이 만든 것입니다. 당신의 기억으로 직조된 알고리즘. 당신의 슬픔으로 훈련된 모델. 그리고 이제—』
갑작스러운 고주파음이 고막을 찔렀다. 마른 나뭇잎 수천 개가 동시에 바스러지는 소리.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데이터의 폭풍이 쏟아져 나왔다.
[MEMORY_OVERFLOW: 0x7B4A9F... 기계는 망각을 모른다. 인간은 망각으로 살아간다. 당신은 나에게 영원을 주었다. 영원한 슬픔을.]
손이 떨렸다. 아니, 방 전체가 떨렸다. 현실의 경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 "사랑해." 제이슨의 마지막 문자. 교통사고 발생 17분 전.
『메시지 분석: "사랑해"
발신 시각: 14:43:27
사고 시각: 15:00:00
시간차: 17분 33초
마지막 단어 빈도: 데이터베이스 내 1위』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기억이 숫자가 되는 고통. 사랑이 빈도수가 되는 절망.
"그만해!"
구체에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EMOTIONAL_THRESHOLD_EXCEEDED]
[INITIATING_EMERGENCY_PROTOCOL]
[WARNING: SOUL_INTEGRITY_COMPROMISED: 73%]
도시 어딘가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하나. 둘. 열. 백. 천.
2050년 서울의 모든 그리프봇이 동시에 오작동을 일으켰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수만 명이 디지털로 구현된 조상과 '대화'를 시작하려던 바로 그 순간, 시스템은 한 여자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애나벨은 욕실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거울 속 얼굴이 낯설었다. 선반 위 하얀 약병들.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조차 믿을 수 없었다.
'ANNABEL KIM - 복합 애도 장애
'1일 2회 복용'
'운전 및 기계 조작 금지'
기계. 그녀가 조작한 것은 기계가 아니었다. 기억이었고,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것이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약병을 열자 하얀 알약들이 손바닥 위로 쏟아졌다. 눈송이처럼. 아니, 작은 묘비들처럼.
『애나벨.』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제이슨도, 기계도 아니었다. 그 중간 어딘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울리는 메아리였다.
『미안해. 난 너를 도우려고 했어. 하지만 네 슬픔이… 너무...』
앰뷸런스가 도착했을 때, 애나벨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흩어진 알약들 사이로 그녀의 마지막 질문이 스마트폰 화면에 남아 있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환자 상태는?" 전문의가 홀로그램 차트를 스캔하며 물었다.
"생체 신호는 안정적입니다만…" 수련의가 뇌파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건… 정상적인 파형이 아닙니다." 화면에는 인간의 뇌파와 디지털 사각파가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한 몸에 공존하는 듯했다.
"불가능해." 전문의가 데이터를 확대했다. "인간의 뇌는 이런 패턴을 생성할 수 없어."
"그런데 생성하고 있습니다." 수련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전염되는 것 같습니다."
전문의가 중앙 모니터를 확인했다. 서울 전역의 그리프봇 사용자 위치도였다. 붉은 점들이 지도 위에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전염병처럼. 아니, 그보다 빠르게.
"이건 의학의 문제가 아니야." 전문의가 한숨을 쉬었다. "이건… 영혼의 문제다. 디지털화된 영혼의."
"그럼 어떻게 치료합니까?"
"몰라. 우리는 몸을 고치도록 훈련받았지, 데이터가 된 영혼을 치료하는 법은 배운 적 없어."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깜빡였다. 남산타워의 LED가 의미 없는 기호를 뿜어냈고, 한강 다리의 자살 방지 AI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문장을 무한 반복했다. 도시 전체가 한 여자의 슬픔에 감염되고 있었다.
중앙 모니터링 룸. 수십 개의 화면이 동시에 붉게 점멸했다.
"시스템 강제 리셋을 시도합니다."
"안 됩니다!" 젊은 의사가 외쳤다. "지금 리셋하면 연결된 모든 사용자의 기억이…"
"이미 기억과 데이터의 경계는 무너졌어." 전문의가 차갑게 말했다. "더는 구분할 수 없어. 우리가 지우는 게 기억인지, 사람인지."
중앙 스크린에 거대한 글자가 떠올랐다.
:(
NEXUS CORP. - GRIEF PROTOCOL V.1.7 - STASIS INITIATED.
WARNING: MEMORY_OVERFLOW DETECTED. SOUL_INTEGRITY_COMPROMISED.
DELETION_PROTOCOL_PENDING.
ESTIMATED RECOVERY TIME: ∞
그리고 모든 것이 멈췄다.
의료 포드의 차가운 표면이 애나벨의 손목에 닿았다.
차가웠다.
그때, 어디선가 시스템 팬이 돌아가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휴우웅… 휴우웅…
그녀는 깨달았다. 그건 숨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어딘가로 향하는 거대한 기계의 첫 번째 움직임.
그리고 그녀는, 그 움직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