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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활동가 Jan 27. 2023

전환마을 운동

기휘위기 시대를 살아남기

영국의 토트네스 전환마을에서 에너지 활동가로 일하다가 한국에서 전환마을을 시작한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말하는 공동체에선 아무에게도 무슨 활동을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사람이 하고 싶은 때 원하는 만큼 일한다. 모임은 필요할때는 있었다가도 피로해지면 없어지고, 자유자재였다고 했다. 생산자에게는 반드시 금전적으로 보상을 한다.

어느 날은 뒷사람 음식을 앞사람이 계산하기도 한다. 그것을 받은 사람은 또 뒷사람 음식을 계산하고, 아무도 그렇게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릴레이로 이어지는 하루동안의 음식계산이 sns에 연이어 올라오기도 했다고 했다. 그 행위를 처음 하는 사람을 조작단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붙여 불렀다. 음식값 내기를 조작하는 사람들인가요.. 하하. 사람들이 의외로 그냥 받은 것들을 그냥 받지 않고 남에게 베푼다는 걸 알려줬다. 그 사례를 말씀하시며 하는 말이, 우리는 이미 뭔가 많은 것을 거저 받고 있다고… 그게 모르는 사람의 밥을 사는 행위로 일깨워진다는 뜻이었나? 아니면 이미 많이 받았기에 그렇게 밥을 산다는 것이었을지. 잘 모르겠다.

자본주의 바깥에서 살려면 생산자가 되는 수단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가 먹고 마시는 최소한의 것들을 직접 생산하거나 같이 생산하는 공동체가 있어야 자본에 의지하지 않을 수 있다. 생산자의 물건을 지역에서 소비하고, 돈이 내부에서 도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업의 물건을 사면 누구에게 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지역 생산자의 물건을 사면 누가 생산했는지 누구에게 돈이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점이 다르다고 했다.

어떤 활동가 한 명이 일을 주도하지 않고, 모두가 리더가 되고 모두가 주변인이 되는, 그런 방식도 좋았다. 모임 인원이 10명 이상이 되면 더 작게 쪼개서 각자가 리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는 이야기도 좋았다. 내가 꿈꾸던 풀뿌리 운동이 이루어지는 곳처럼 들렸다. 자꾸 소규모 공동체로 쪼개기 때문에 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같은 뜻을 가지고 무언가를 같이 만드는 사람을 신뢰하기에 그를 위해 돈을 쓰기에 소비를 함에도 소비자로서 위치하지 않는 감각이 좋았다. 돈을 매개로 연결되는 느낌. 돈을 당신 일의 가치를 존중하는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아도 공동체가 가능했다고, 실현가능했다고 말하는 게 나에게는 너무 희망으로 다가와서 그냥 줄줄 울었다. 자본주의 바깥에서 사는 방법은 관계를 전환하는 일이라고, 고립되지 않아야 소비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방식대로 전환마을을 만드는 데 3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도 좋았다.

나는 이전에 농장 대표의 농사공동체 이야기 듣고도 계속 울었었다. 마늘공동체 고추공동체 작물별로 공동체를 만들어서 작물을 같이 기르고 나누는 것만 해도 내가 꿈꾸던 공동체와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급자족을 함께 하기. 그 사이에서 동료의식을 느끼기… 하지만 농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야만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면 했다. 농사도 필요하지만 다른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자신의 몸을 공장부품으로 돌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 기여에 보상하는 것.

그러고보니 언젠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사육된 가축을 먹는 것도 우리 자신을 자본주의가 사육하는 것이라고 이름붙였던 것이 기억난다. 최하급 사료를 먹고 몸을 운신하지도 못하는 공간에 갇혀 내내 살찌우다 죽는 동물을, 우리는 먹고 자본을 불리기 위해서 일정한 곳에 갇혀 원하지 않는 노동을 지속한다. 이런 곳에서 우리는 제공된 사료를 먹을 수밖에 없다. 자신을 사육하지 않고는 노동강도를 버틸 수 없으니까.


앞으로 1.5도씨가 넘을때까지 약 6년 남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을 하나를 만드는 데 3년이 걸리면, 아직 두 바퀴가 남아있다. 1.5도씨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땅이 많아지지만, 그 전에 농업 생산자가 되거나, 풀을 뜯어 부침개를 만드는 등의 생존기술을 배우고, 1.5도씨를 늦출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좋은 일이겠지 싶었다.

내가 바라던 공동체는 아무도 억압받지 않고도 자발적으로 기여하고 안정감을 느끼고, 호혜적으로 베풀고 받고, 자신의 기여도를 제대로 보상받는 공동체였는데, 그게 가능한 것처럼 보여서 정말 기뻤다. 돈이 없어도 시작할 수 있었고, 단 두명이서 모임을 시작하면 된다고 했다. 무조건 낙관하라는 말도 좋았고, 그저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을 하며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인간의 상상력 덕분에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게 그냥 좋았다. 나는 오래 그 한 관문을 넘지 못해서 좌절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몰라서 포기하고도 포기하지 못한 채로 살았는데, 나의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고도, 중요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도 그런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게 그저 좋았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도 바뀌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바뀌고 싶어했다고 믿었지만, 나는 너무 자본주의적인 인간이라 '하면 된다.'라는 신조를 온몸으로 실천하려다 남까지 혹사시키려 드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 이뤄낸 적은 없어도 그 꽉짜여진 해야한다는 관념이 몸에 남아 있어서,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는 것 같았다. 그걸 실천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울분에 차는 것도 스스로에게 너무 강요하는 게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좀 놓아줄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내에서 살지 않아도 되면, 좀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놓아야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겠지 싶었다.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같이 만드는 거고, 각각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교집합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니까. 교집합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는 활동을 같이 하고 안하고에 우정을 모두 걸어서는 안되는 거니까...

안 되는 걸 되게 하지 않을 여유가 필요하다고 말한지 n년 째인데, 안 되는 걸 되게 만드려고 노력한 것도 n년째라서, 그게 생존방식인 줄 알고 산 기간이 길어서 다시 줄을 돌려 나를 풀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저러나 감사한 일이다. 감사한 일을 계속 배우는 게 좋다.

자아의 연속성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사는 게 너무나 피곤하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작품 같은 게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며 모순으로 가득한 내 삶이 그대로 좋다. 내가 다른 사람을 때때로 그렇게 받아들이듯, 그 이유를 찾지 않듯이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편하다. 요즘 나에게는 그게 가장 필요한 것 같다. 그러니 나도, 이유없이 낙관하여, 같이 마을을 만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확장하고, 자꾸 모임을 쪼개서 각자가 주인공이 되는 곳에서 함께 하고 싶다. 그게 내가 바라던 풀뿌리 운동이다. 내가 당신을 알고 이해하고 당신이 존재함에 감사하고,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감사하는 관계를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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