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의 꿈처럼, 하와이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살고 있던 아파트를 정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기부터, 인터넷, 계약, 이사 등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으로 직접 한 곳이라 정리하는 단계 또한 기분이 참 오묘했다. 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던 어마어마했던 렌트비를 11개월이나 내고 살았던 것에 감사하며, 후련하게 나왔다. 그리고 지원했던 STEM education 전공의 대학원 offer letter를 받았다. 역시 똑같이 장학금 문의를 프로그램 담당자 등 학과의 여러 사람들에게 문의했다, 하지만 2017-2018은 마감되었으니, 2018-2019는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때, 지질학 전공의 대학원에서는 Graduate assistantship이라는 이름으로 당장 9월부터 1년에 24학점까지 면제와 매달 소정의 Stipend를 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지원이 마감되고, 추가 지원을 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하늘의 뜻인지 마침 오퍼를 받았던 한 명이 다른 학교로 가서, 자리가 비게 되어, 내게 그 오퍼가 들어왔다. 먼저, 지원한 두 학교 모두 합격을 받아 보람이 있었고, 엄청난 고민을 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한테도 물어보고, 조언도 많이 구했지만 역시 사람인지라 무엇보다도 돈 문제였다. 아무리 부모님께서 도와주신고 하셔도, 미국의 학비는 그 금액이 어마어마하고, 20대 중반 부모님께 손 벌리기에는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나는 하고 싶었던 공부보다, 어디 가서 든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고, Graduate assistantship을 받고, "지질학"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 내에, 참 많은 문제들이 순식간에 생겼고, 일했던 학교는 끝이 났고, 정신없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대학원생의 삶이었다. 한국 사람들 거의 없고, 조그마한 공립 대학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됨을 우선했던듯싶다. 상상하지도 못한 "석사"생활을 앞두며 7월 말이 되었다. I-20를 트랜스퍼하고, H-4 서류를 작성하고, 건강 검진을 받고, 학교 보험을 가입하는 등 새로운 시작에 분주했다. 모든 것 하나하나를 혼자 처리해야 함은 어려웠지만, 오히려 한 배를 타고 있던 누군가에 의해 비바람을 맞이할 가능성이 없고, 이제 온전히 모든 것 하나하나가 나의 책임이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십 번 피 말리게 했던 곳과 얽히고설켜 하루빨리 끊어져야 했던 연결고리를 끊고 나니 마음 한편으로 참 홀가분했다. 어쩌면 진작부터 이렇게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사람"에 대한 상처는 덜 받았을까? 미움도 원망도 필요 없었다. 슬프지만, 그로 인해 아무것도 모른 나이에 모르고 시작한 미국 생활이었고, 내가 누리고 가질 수 있었던 것들에 감사하며, 지나온 삶의 일부였으니까. 이제는 추억으로 기억한다.
참 공허한 여름이 될 뻔하였는데, 미국에 이민 온 지 1달도 채 되지 않는 주재원 가정의 3학년, 4학년 여자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그 집에 가다 보니, 다른 일을 할 생각을 못 한 채 방학이 끝나갔다. 가끔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우고, 대학원생 오리엔테이션, international student 오리엔테이션, TA 오리엔테이션 등등을 참석하다 보니 미국에 온 지도 2년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훌쩍 9월이 다가왔고, 지금까지 삶과 다른 너무나 다른 새로운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