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와 존중; 팬덤 커뮤니케이션의 역설적 성공 공식

팬을 버린 브랜드의 최후: 재규어가 가르쳐준 팬덤 커뮤니케이션의 법칙

by 박찬우

2024년 11월 19일, 영국의 유서 깊은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는 'Copy Nothing(아무것도 모방하지 않는다)'이라는 야심 찬 리브랜딩 캠페인을 공개했습니다. 대중적 프리미엄 시장을 벗어나 벤틀리, 포르쉐와 경쟁하는 초고가 전기차 럭셔리 브랜드로 재탄생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기존 내연기관 모델 생산을 과감히 중단하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완전히 쇄신했습니다.


재규어가 공개한 'Copy Nothing' 캠페인 영상

그러나 공개된 영상은 기존 팬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자동차 회사의 광고임에도 자동차는 단 1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난해한 의상의 모델들이 추상적 퍼포먼스를 펼쳤고, 재규어의 상징이었던 '포효하는 표범' 대신 미니멀한 타이포그래피만이 화면을 채웠습니다. 창립자 윌리엄 라이온즈의 철학을 계승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가 평생 추구했던 '우아한 성능의 구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중의 눈에는 정체불명의 패션 광고로만 비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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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은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습니다. 'British Racing Green' 감성과 우아한 성능을 사랑했던 기존 팬덤은 브랜드가 자신들의 역사를 부정했다고 느꼈습니다. "재규어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자동차 회사가 자동차를 부끄러워한다"는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일론 머스크조차 "도대체 차는 어디 있느냐?"며 비판했습니다.


결과는 숫자로 증명되었습니다. 2025년 4월 유럽 시장에서 재규어는 전년 동기 1,961대 대비 단 49대만 팔렸습니다. 97.5%의 판매 폭락입니다. 신차 출시 전 기대감 조성에 실패한 상황에서 구형 모델 단종까지 겹치며, 브랜드는 사실상 시장에서 소멸했습니다.


재규어의 실패는 세 가지 치명적 오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첫째, 기존 팬덤을 적으로 돌렸습니다. 재규어는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기존 재규어가 쌓아온 모든 유산을 '지루하고 낡은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는 기존 팬덤이 사랑했던 가치를 브랜드 스스로가 조롱한 것과 같았습니다.


둘째, 해석 불가능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재규어는 새로운 전기차의 실물을 공개하기도 전에, 모호한 철학과 비주얼 아트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습니다. 팬덤은 '해석할 거리'가 필요하지만, 재규어는 '해석조차 불가능한' 추상적인 이미지만 던졌습니다.


셋째, 어느 팬덤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기존 팬덤을 '낡은 과거'로 치부하여 적으로 돌렸으나,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젠지(Gen Z) 럭셔리 팬덤'은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모호한 커뮤니케이션은 기존 시장과 신규 시장 모두에서 외면받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팬덤 커뮤니케이션 실패가 단순히 이미지 손상을 넘어 비즈니스 붕괴로 이어지는 극단적 사례입니다. 팬덤은 일방적으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장의 핵심에는 브랜드와 팬 사이의 건강한 관계 설정, 즉 팬덤 커뮤니케이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팬덤 커뮤니케이션이란


팬덤 커뮤니케이션은 브랜드와 그 브랜드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팬들 간의 지속적이고 쌍방향적인 관계 형성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고 구매하는 거래적 관계를 넘어, 브랜드의 가치와 철학에 공감하며 자발적으로 브랜드를 옹호하고 확산시키는 깊은 감정적 유대를 의미합니다.


팬덤 커뮤니케이션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정체성 융합'입니다. 팬들이 브랜드를 자기 자신의 일부처럼 여기게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브랜드의 팬은 브랜드를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나는 애플 유저야", "나는 나이키를 신어"라는 말이 그저 물건을 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정체성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랜드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을 명확히 보여주고, 그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브랜드의 팬으로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아무도 진짜 팬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 쌍방향 대화와 서사의 공유입니다. 과거 마케팅이 기업이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면, 팬덤 커뮤니케이션은 브랜드와 팬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는 브랜드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통해 더 깊어집니다. 브랜드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관된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2025년 현재는 단순히 제품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브랜드가 사회적으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환경을 얼마나 고려하는지, 다양성을 존중하는지까지 모두 포함된 큰 그림의 이야기가 중요해졌습니다.


셋째, 다섯 가지 핵심 감정의 조합입니다. 팬덤 커뮤니케이션은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만들어집니다. '소속감'은 '나도 이 커뮤니티의 한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입니다. '자부심'은 이 브랜드 제품을 쓰는 게 자랑스러운 감정이고, '포용성'은 누가 와도 환영받는다는 느낌입니다. '공감'은 브랜드가 나를 이해해 준다는 확신이며, '영감'은 이 브랜드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동기부여입니다. 이 다섯 가지 감정이 함께 작용할 때 효과적인 팬덤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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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팬을 능동적으로 참여시킵니다. 팬덤 커뮤니케이션은 고객을 단순한 구매자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로 대합니다. 레고는 '레고 아이디어'라는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들이 직접 제품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다른 팬들의 동의를 얻으면 실제 제품으로 출시합니다. 나이키는 원하는 디자인을 텍스트로 입력하면 AI가 이를 분석해 자동으로 스니커 디자인을 생성하죠. 머리로 생각하게 만들고(인지), 마음으로 느끼게 하고(감정), 실제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행동)입니다. SNS에서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게 아니라, 진짜로 생각하고, 느끼고, 움직이게 만드는 거죠.


다섯째, 지속성과 일관성입니다. 팬덤 커뮤니케이션은 한 번의 이벤트나 캠페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일관된 브랜드 메시지와 가치를 바탕으로 팬들과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팬 주도의 자율성 존중입니다. 2025년 현재 팬덤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을 보면 큰 변화가 있습니다. 기업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팬들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자기 방식대로 브랜드를 표현하도록 열어두는 쪽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논리적인 설득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또한 광고, 브랜디드 콘텐츠, 입소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통합된 메시지를 만드는 접근이 필수가 되었습니다.


팬덤 커뮤니케이션의 실행전략 : 거리 두기와 존중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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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중심 관점과 디지털 크라우드 컬쳐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기업의 디지털 마케팅 전략과 브랜드 팬덤 구축을 위한 맞춤형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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