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되짚어 봐도 기억이 깜깜하네
분명 난 저녁 먹고 숟가락 놓자마자 곧장 소파로 갔지. 다시 식탁으로 간 기억이 없어. 약을 안 먹은 거지. 그래도 혹시 몰라 쓰레기통에 약봉지를 확인했더니 여러 개가 뒤섞여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일에 너무 골똘하면 어느 순간 사실과 상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땐 진흙 주무르듯 생각하는 데로 생각이 만들어진다. 헷갈리는 내 생각을 굳히기 위해 정리를 한다. 언제나처럼 숟가락 놓고 물 먹으면서 약까지 먹었어. 매일 그랬던 것처럼. 맞아 먹었네.
한참 TV를 보다가 찜찜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다시 생각을 뒤집는다. 밥 먹고 오늘은 시간이 있으니까 잠깐 미뤘지. 좀 있다 먹어야지 하고. 맞아, 안 먹었네.
아! 모르겠다. 한 번 더 먹느니 오늘은 건너뛰기로 하자. 약 한 번 안 먹는다고 금방 죽는 거 아니니까. 잠들기 전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이불속으로 가기 전 약봉지가 놓여 있는 식탁 위를 힐끔 본다. 낼 어디 다니다 배 아프면 곤란하니까. 먹고 자자. 한 번 더 먹는다고 죽지 않아.
이런 경험 나만 있나? '레드썬' 당신은 지금부터 최면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밥 먹고 다음 무엇을 했나요? 기억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확인하고 싶네.
한 2-3년 전부터 혈압약 먹는 아내는 가끔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까먹는다며 난감해했다. 그다음부터 캡슐 알약 껍질 뒷면에 네임펜으로 1~30까지 숫자를 써넣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먹는데 가끔 어딜 급하게 가야 할 때가 있다든지, 휴일 늦잠을 자고 일어나는 등 일상생활 패턴이 바뀔 때는 덩달아 습관도 엉켜버린다. 그럴 때 숫자를 보며 그날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시골집 식탁 앞 벽에는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위에서 두 줄 하고 중간쯤까지 숫자가 적힌 동그라미가 있고, 아래 서너 줄은 빈 동그라미가 삐뚤빼뚤 오와 열이 맞춰져 있었다. 규칙도 패턴도 알 수 없는 종이의 정체에 대해 아버지에게 물었더니
"내가 정신이 없어 연탄불을 갈 때마다 시간을 적어 넣고 표시를 해두는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11, 12, 5, 6, 8 등 숫자의 간격이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 나이 올해 여든일곱.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니 자신만 알 수 있는 메모로 기억을 붙잡고 계신다.
모든 일을 잘 기억하는 게 희망과 능력이 되기도 한다. 때론 모든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게 절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방금 내 등 뒤로 흘러간 시간에 대한 기억을 붙잡는 일이 언제부턴가 일이 되고 있다. 희망과 절망을 넘어 일상의 기억을 붙드는 것이 일이 되어 버렸는데도 허허 웃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