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 - 건축학 개론
어떤 영화는 개봉 당시엔 별 관심 없다가 시간이 지나 재해석되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처음엔 재미나게 봤는데 시간이 지나서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넷플릭스 메뉴를 돌리다 보면 끄트머리쯤, 벽장에 숨어 있듯 오래된 옛날 책처럼 다시 보고 싶은 잔잔한 영화들이 있다. 먼지 툭툭 털고 다시 꺼내 보듯 눌러본다. 요즘 그 재미에 빠졌다.
오늘은 <건축학 개론>이다. 과거와 현재를 액자 속으로 들락거리는 서현과 승민의 오래된 첫사랑. 우리 모두의 첫사랑 얘기.
우선, 영화 속 곳곳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이 있다. 순식간에 우리 곁에 왔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들. 스마트폰 세대들은 알지 못하는 골동품 같은 것들 - 필름 카메라, CD플레이어, 펜티엄 컴퓨터, 삐삐 등등.
이런 것들을 보면 잊혔던 추억이 수채화 물감처럼 빙그레 웃음 번져 나오게 하는 게 하나쯤은 있다. 필름 카메라는 사진이 잘 찍혔는지 못 찍혔는지는 확인하려면 현상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휴대폰 전에 나온 삐삐는 소통 도구로써 당시엔 매우 혁신적이었다. 대형화재 등으로 비상소집이 걸릴 땐 암호 같은 숫자들이 찍혔다. CD플레이어는 고가인 데다 MP3가 너무 빨리 나오는 바람에 소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승민이 선배가 후배들에게 뻐기며 쓰던 펜티엄 1G가 컴퓨터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금부터 불과 20여 년 전인데 100년 전 개화기 언저리쯤으로 느껴진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세상 참 빨리 간다. 앞뒤 돌아볼 새도 없이.
포스터 타이틀처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사람에겐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 첫사랑. 두 번째 사랑은 첫사랑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설이나 시, 영화의 영원한 주제가 되었고, 될 것이다.
예전엔 첫사랑의 경험을 공유할 기회가 지금보다 적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책이나 이야기로 읽고 듣는 것밖에 없었기에 감정이입이 좀 덜 했을 것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을지 모르겠다.
<건축학 개론>에서 내가 찾은 답이 있다. 첫사랑은 망설임이다. 망설임 뒤에 용기가 있고, 용기 뒤에 고백이 있고, 고백 뒤엔 기회가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의 공식이다.
지금 세대는 좀 다른 것 같다. 사이버 공간이라는 특이한 놀이터를 가지고 감정을 공유하고 할 기회가 많다. 고백에 대한 개념도 감정의 표현도 다르다. 직접적이고 도발적이다. 기회가 많아서 그런지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상처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상처 받겠지만. 그래서 첫사랑에 대한 설렘과 기대도 낮고, 몰입감과 간절함도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2020년에 서현을 넣으면 승민에 대한 감정을 감추거나 망설이지 않을 것이고, 승민 역시 빠르고 당당하게 고백하지 않았을까.
서현은 승민의 키스와 감정을 읽고 있었지만 기다렸고, 승민은 서현의 마음을 얻기 위한 고백을 미루다 놓치고 말았다. 중년에 다시 만났지만 젊은 날의 감정을 되살릴 순 없었다. 과거의 감정에 대한 확인이었을 뿐이었다. 설렘이 줄어든 가슴엔 세파를 겪은 세월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건축학 개론>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순수한 첫사랑의 추억을 들춰주고, 그날들이 떠올라 가슴 설레게 하고, 첫눈 오는 날을 기다리게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한다.
엄동설한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햇살 좋은 날 제주 바닷가에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고 그냥 맵기만 한 매운탕을 먹고', 바다 풍경이 펼쳐진 창 넓은 집 창가에 앉아 그들의 사랑을 떠올리며 가슴 설레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