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히 멀어 닿지 않을 것 같은 바다
가족들이 만나지 못하는 또 다른 설날의 풍경을 코로나가 가져다주었다. 내심 번거롭지 않고 조용히 보낼 수 있다는 또 다른 해석이 싫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살아남기 위해 코로나를 앞세워 변화를 꽤 하고 있는 거구나 싶다.
바다야 늘 같지만 보고 싶은 이유는 다 다르다. 객지에서 공부하느라 지치고, 안개처럼 뿌연 청춘의 시간을 헤쳐가느라 힘든 딸. 집 밖을 나갈 이유를 찾지 못해 유배처럼 살고 있는 아내. 친구와 바다 보러 떠난 아들이 부러워 내심 말을 안 해도 '나도 바다 보고 싶다'라고 표정으로 말하는 두 사람. 그리고 나. 집과 사무실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간 몇 달간의 데자뷔 같은 삶에서 잠시라도 나를 해방시키고 싶기도 했다.
잠깐 보는 바다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에다 코로나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모험적인 여행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감행되었다. 휴게소에서는 화장실만 잠깐 다녀왔고, 점심 식사도 세 시가 되어 한가한 시간에 먹었다. 정동진 바닷가는 연휴가 끝나가는 시간이라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여서 관광지로서는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역 앞쪽엔 한 사람도 없는 빈 공간이어서 마스크 조차도 필요 없어서 반가웠다.
나는 현실은 개척하고 도전해야만 하는 시간이라는 설득의 대화로. 딸은 코로나 변수에 막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처럼 안갯속 미로를 헤매고 있는 청춘의 갑갑함을 토로하는 대화로. 두 입장의 대화는 치킨게임을 하는 차처럼 달렸다. 출발하고 삼십여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대화는 끊겼고, 고요한 침묵 속에 창 밖을 스치는 풍절음만이 어색한 공간을 배회했다. 한 시간 가량 침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계속되어야 했다. 대화를 하기에 집 보다 달리는 차속 공간이 훨씬 유리하다. 집이었다면 벌써 각자의 방으로 달아나 버렸을 텐데, 차 안에선 회피할 공간도 없을뿐더러 지나는 풍경 속에서 차례로 나타나는 얘깃거리가 분위기를 자연스레 바꿔 주었다. 어색하고 부담스러워도 어찌어찌 견뎌냈다. 음악이 한몫했다.
점심 식사 후 커피를 한 잔 들고 바다 앞에 섰다. 서로의 입장에서 할 얘기 다 한 듯 하지만 결론 없이 끝난 아쉬움. 그 아쉬움을 달래야 했고, 이왕 맘먹은 김에 더 명확하게 상대방을 이해시키지 위한 각자의 입장을 꺼냈다. 어쩌면 영원히 좁혀질 수 없는 차이를 말하지만 차에서 했던 것보다는 한 발 더 물러나 들었더니 내 말보다 상대방 말이 더 잘 들렸다. 바다 덕분인가 보다.
"아빠 걱정은 이해할 수 있어요. 나도 뭐든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아빠가 걱정하는 건 딸이 가려고 하는 길이 혹시 막혀 선택지가 없거나 좁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다. 부딪쳐 보고 안되면 돌아가는 방법도 있으니 현명하게 잘 대처하리라 믿는다."
오해와 이해가 부딪치면서도 서로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대화를 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싸움 같은 대화를 듣느라 아내 속은 숯이 되었겠지만.
등 뒤엔 소나무 가지 사이로 기차가 지나고, 끝없어 평평한 바다가 그리는 수평선 위아래로 바다도 하늘도 백지 같은 허공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인가 싶을 정도로 좋다. 멍 때리며 바라보는 바다가 약이다.
언덕 위에 있는 크루즈선에서 하룻밤 지내자는 얘기를 꺼냈더니 웃으며 모두 같을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까마득히 멀기만 해 닿을 것 같지 않은 바다도 마침내 수평선에서 만난다.
잠깐 본 바다.
코로나에 갇힌 일상을 잠시나마 쓸어 가고, 내 마음을 밝게 열어 준 고마운 정동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