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오는 길, 주덕

by 벽우 김영래

평소 너무 흔해서 공기의 소중함을 잊듯 태양의 고마움과 소중함도 잊고 지낼 때가 많다. 요즘같이 더운 날씨에는 역설적이게도 고마움 잊고 당장 눈 앞의 괴로움에 원망을 토로하기도 한다.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에의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자주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퇴근 시간에 딱 맞춰 있는 7시 기차를 타기에는 여유가 많다. 저녁 먹고 양치질도 하고 인터넷 뉴스도 보다가 정확히 20분 전에 사무실을 나선다. 유리문을 열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숨을 턱 막는 한증막 같은 열기다. 어쩜 안과 밖이 이렇게 다른 세상인지 저절로 입이 쩍 벌어진다. 태양을 피하지 못한 아스팔트는 열기를 머금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면서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뱉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뜨거움은 바다처럼 넓게 골고루 퍼져서 물결처럼 출렁이듯 몇 발자국 걷는 동안 이미 온몸을 휘감는다.

왼쪽 길옆에 있는 밭에는 초여름의 가뭄을 힘겹게 버틴 참깨들이 폭염을 견디며 창백한 얼굴로 흰 꽃을 피워내고 있다.

"저 놈들은 스스로 고소해지기 위해 가을 햇살까지 견디겠지". 농부는 인도 쪽으로는 행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옥수수를 심었다. 큰 키의 근엄한 호위병들이 도열해 있는 듯하다. 그것 역시 가뭄과 태양에 지친 듯 가냘픈 몸매에 덧니박이가 든 것 같은 옥수수 통에 할아버지 수염 같은 엉크런 수염이 듬성듬성 삐져나와 늘어져 있다.

성당을 가기 전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집들 사이사이로 좁고 짧은 골목이 보이고 일부 무너진 콘크리트 담벼락 사이에선 코스모스와 봉선화가 애닮 게 피어있다. 화장실 냄새가 뒤엉킨 퀴퀴한 삶의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처마 밑 비료포대와 깨진 화분에 심긴 채송화 줄기는 풍성하게 늘어져 가지가 말라가고 있다. 모래 속 자석에 달라붙는 쇠가루 같은 씨앗이 한눈에 봐도 오글오글 떨어져 있다. 보도블록 틈새에 뿌리를 내린 어린싹들이 줄 맞춰 자라고 있다. 그 모양이 예뻐 희망 같은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어쩜 그 작은 씨앗에서 그와 똑같은 생명들을 키워 내는지........

성당 마당엔 아침에 서 있던 승용차들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더워서 그런지 호수 밑바닥 같다는 말을 절로 실감한다.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맞은편에 있는 전파사 내부는 온갖 골동품의 전자기기들이 가득 쌓여 있다. 버리긴 아깝고 별로 쓸데는 없는 것들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알 수 없는 기술의 신뢰를 느끼게 되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러닝셔츠 차림의 주인아저씨가 주황색 스탠드 불빛 아래서 뭔가를 수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나 어릴 적엔 고장 난 흑백 TV를 잘 고쳐주던 원미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몇 해 전만 해도 유명했던 만능 전파사도 지금은 변화된 세태에 시들해졌다. 각 메이커에서 운영하는 서비스센터에 가지고 가면 친절하고 빠르게 잘 고쳐주니 절로 그런 메이커의 제품들만 찾게 된다. 주황 불빛 아래서 침침한 눈을 비비며 ‘다 고쳤네’ 하며 웃는 사람의 얼굴은 보기 드물어졌다.


다방 문 옆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와 신호를 기다리는 차에서도 더운 열기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냉기로 가득 찬 편의점의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창. 고스트 영화처럼 스며들 듯 들어가서 잠시 땀을 식히고 싶은 유혹이 온몸에 전율처럼 흐른다. 정말 시원하겠네.

버스 정류장엔 젖은 빨래처럼 축 처진 두 명의 아저씨가 땀 냄새를 풍기며 담배를 피우고 그 옆 그늘 의자엔 검고 키 작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신들의 언어로 하루를 풀어내고 있다.

아침에 본 사랑 호프는 밤 같은 낮을 보내고 다시 낮 같은 밤을 위하여 사랑의 역학관계를 끌어내기 위해 어둠 침침한 내부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건너편 고래고래 편의 노래방을 선전하는 바람 풍선이 큰 키를 주체하지 못하고 술 취한 사람처럼 춤을 추고 있다.


등에 땀이 촉촉이 젖을 만큼 걸어오면 역에 도착한다. ‘겨울에는 봄의 길들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김훈의 글처럼 지금 이 순간 아무리 매서운 겨울바람을 떠올려도 몸이 시원해지지는 않는다. 투명 유리 속의 편의점 바람이 더 현실적이기에.


철길 주변 자갈에는 명아주와 쇠비름 그리고 이름 모를 들풀들이 더위와 철마의 공포를 견디며 이 여름을 버텨내고 있다. 저 멀리 철컥철컥 기차가 전조등을 켜고 들어온다.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즐거운 출근길, 주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