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자의여행일기 1

우연히 마주한 골목길과 밤바다와 노래와 재잘재잘되던 무엇과 무엇들...

by 벽우 김영래

친구란 추억이 공유되는 길이에 따라 우정의 깊이가 달라진다. 사회에서 문득 만난 동갑내기도 같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함께 떠오르는 기억이 없기 때문에 서먹한 것이다. 지나온 시간 속을 더듬어 단순한 공통분모로 고개를 끄덕일 순 있지만 그것으로 삶을 나눌 수는 없다.


세 친구들이 떠나는 여행은 시작부터 '월튼네 사람들'과 같은 오래된 TV프로와 추억의 노래와 무엇과 무엇들로, 분주하게 오가는 화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시끄럽게 시작되었다. 잠시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이란 덜어진 일상의 무게만큼 가벼워진다.


길은 잘 아는 곳에서 시작해 어둠 속 터널을 들어가 듯 점점 더 모를 곳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 여행은 걱정 없다. 측량과 지도 만드는 일을 하는 지리 박사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를 잠깐 올랐다 이내 국도로 내려왔고, 4차선에서 2차선으로 다시 좁아졌다. 스치는 풍경의 속도가 달라진다. 마치 뿌옇던 화면이 차츰 밝아지듯 말이다. 속속들이 보인다.

봉정사 마루기둥.jp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보물이 가득하다는 봉정사에 들렀다. 안내 간판을 보고서야 알았다. 봉정암과 헛갈려 그게 그건 줄 알았다. 단청 없는 사찰은 어쩐지 더 오래되어 귀하고 범접 못할 엄숙함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빗살무늬 토기 같은 빗질 자국 선명한 마당을 걷는 건 아주 오래된 시간의 무게에 눌려 시나브로 고요를 마주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고, 뒷짐 져 마주 잡은 손들이 더 따뜻해진다. 보물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마당에 널어놨다.


시골길에서 만나는 손바닥 같은 운동장을 품은 학교들이 정겹다. 다 떠나고 몇몇 가냘픈 목숨처럼 서 있는 교정은 새 단장을 하느라 알록달록 색칠을 하고, 세종대왕 동상을 닦아 보지만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가지 잘린 채 몸통만 덩그러니 서 있는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애잔하다. 그것마저도 견디지 못한 학교들은 새로운 간판을 달았다.


가려했던 별빛 펜션 예약을 못해 첫 숙소는 현지에서 직접 찾기로 했다. 바다를 앞마당으로 둔 해안가를 따라가니 너무 많은 펜션과 펜션, 모텔과 호텔을 가장한 모텔과 무인텔과 1실 1주차 무인텔이 빈틈없이 빼곡하다. 그들은 어떻게 다 먹고 살아가나 괜한 걱정이 앞선다. 친구가 웬만한 펜션보다 무인텔이 낫다는 주장에 멋쩍게 남자 셋이서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문 앞에서 출입하는 방법을 몰라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밤바다.jpg

마당 넓은 큰 건물. 고장 난 네온 간판이 제 역할은 해야 한다고 타이르듯 펜션에만 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묵은 펜션 이름을 아침에야 알았다. 한 귀퉁이 뿌연 유리창에 갇힌 편의점에 들어가니 주인아주머니가 이제야 처음 맞는 손님처럼 반갑게 맞이한다. 얼마냐고 묻자 잠시 망설인다. 얼마를 받아야 우리를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듯했다. 옆 무인텔 보다 쌌다. 방을 보자는 말에 또 망설이듯 키를 여러 개 만지다가 306호를 건네주었다. 넓은 방 가운데 삐걱거릴 것 같은 낡은 침대와 베란다 쇠가 발갛게 녹슬어 있었지만 창 너머 밤바다 풍경은 특급호텔 못지않았다. 우리는 파도 소리 맛집 풍경 숙소에 짐을 풀었다. 주인아주머니와 우리가 모두 안심을 하는 결정이었다.

갯바위에서 따온 미역 한 줄기와 따개비 몇 개를 넣고 끓인 라면과 막걸리 한 잔으로 늦은 밤의 허기를 달래고 잠이 들었다.


유독 소리에 예민한 직업병을 가진 나는 친구들이 쌍으로 골아대는 코고는 소리가 내 호흡 박자에 맞지 않아 밤새 리듬을 찾느라 하얗게 세웠다. 울타리를 넘어오는 양도 세어 보고, 커다란 무를 당기는 동물들도 나열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무실 걱정을 하는지 중얼거리다 웃다가 또 비명 소리를 내는 잠꼬대 소리를 듣다가 차라리 일어나 앉았다. 꿈속에서도 참 치열하게 사는구나. 여기선 좀 잊어버리지.

창밖으로 물살을 가르며 통통배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어부들의 바다를 보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잠들지 못하는 이에게 밤은 멀고 길었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상상도 할 수 없는 성벽의 시간을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