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종기 붙어 앉아 작은 어촌마을의 풍경이느림 미학의완성
영덕에서 울진으로 올라올 때는 큰길을 버리고 작은 간이역마다 들르는 완행열차처럼 작은 항구가 있는 어촌마을 길을 따라왔다. 한 귀퉁이 돌아서면 같은 풍경인 듯 나타나는 작은 터에 옹기종기 붙어 앉은 마을 풍경이 정겹다. 길은 꼬부라지고 멀리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선 바다가 한결 더 맑고 푸르다. 한참을 섰다가 다시 가기를 반복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완성한다. 옛 영화를 뒤로 한 폐선과 엉킨 듯 잘 사려진 그물과 따가운 햇살을 받고 있는 배 가른 오징어와 비릿한 소금기 묻어나는 바람 냄새와 정자 위 두 다리를 끌어 모은 삼삼오오 노인들의 졸리운 대화와 그 밑에 벌써 잠든 삽살개까지.
여행길에서 먹는 일이 중요하고 즐겁긴 하지만 한적한 시골에선 생각만큼 쉽지 않다. 현지인만 아는 맛집이 진짜이긴 한데 알턱이 없으니 주차장 붐비는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다고 소문난 맛집 앞에 줄을 서기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계면쩍음과 쑥스러움에 발길을 돌리고 만다. 그래서 찾는 곳이 기사식당이다. 기사식당은 주유소 옆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일정한 노선 안에 있고, 혼밥이 낯설지 않고, 맛도, 가격도 좋아야 한다. 이런 조건은 운전기사나 중년 남자들끼리의 여행자을 모두 만족시키기엔 충분하다. 호객하는 유명 관광지의 값비싼 식당을 지나치길 정말 잘했다. 아침은 특히나 깊은 국물 맛이 슴슴하고 이름 낯선 물곰탕의 감동은 기사식당 아니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숙소는 모니터 화면 속의 화려함에 낚여 예약했지만 실제 보는 거와 생판 달랐다. 하지만 파도가 출렁이는 풍경에 다시 낚여 정겨운 바람이 훅 들어와 실망을 금세 날려버렸다. 갯바위 올라가 낚시를 했고, 다음날 아침에 또 바닷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웠다. 미역과 톳을 뜯어 국을 끓였다. 텃밭에 나가 상추와 고추를 따고 파를 뽑 듯 그곳은 그렇게 내가 사는 곳과 달랐다. 내 일상과 다름을 발견하는 건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고요한 밤이 되었고, 길에 다니는 차가 가물에 콩 나듯 뜨문뜨문했다. 방파제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검은빛 바다 위를 밤 배 저 밤 배 ~ , 엄마가 섬 그늘에, 얼어붙은 달그림자~. 어둑한 바닷가에 희미한 가로등 빛이 만들어 준 정겨운 세 그림자를 파도가 쓰다듬고 있었다. 마음속에 고요한 기쁨이 파도처럼 일어나 하얗게 부서졌다. 스쳐 지나온 수많은 시간들이 깨어났다. 지금까지 함께 잘 살아와 준 친구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거칠어진 목소리를 섞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아련한 기쁨이 이런 것이구나. 별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지만 곁에 있는 친구들과 저 등대 불빛을 보며 더 어두워질 밤바다를 헤쳐 갈 수 있을 것 같아 큰 위안을 받았다.
청송 얼음계곡의 청량한 바람 좋은 숲길에선 창문을 내리고 얼굴로 맞으며 노래를 불렀다. 울진에서 영주로 돌아오는 36번 국도는 곧게 자란 금강송이 도열한 솔숲의 연속이었다. 백두대간의 등허리를 통째로 관통하는 터널을 지나고 또 지났다.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로 시작해, 소리새의 「그대 그리고 나」, 김정호의 「하얀 나비」, 산울림의 「청춘」 등등, 옛날 할머니 호주머니 속 지폐처럼 꼬깃꼬깃 감춰졌던 노래들이 나왔다. 감성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일 게다.
우리가 어느새 중년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니. 문득 우울해지기도 하고,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가 솟구치기도 한다.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이다. 늙는다는 건/ 시간의 구겨진 옷을 입는 일 (박연준, 「재봉틀과 오븐」 중)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조금 구겨진 옷을 입었을 뿐이다. 겉에 걸친 옷만 조금 구겨졌을 뿐 아직 마음은 빳빳하고 쌩쌩하다.
조금 더 우리의 시간을 만들 여유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타국 멀리 있는 그리운 친구들이 어서 와 함께 어깨동무 길게 드리운 다섯 그림자 비추는 밤바다에서 더 크고 즐겁게 노래 부르고 싶다.
우연히 마주한 골목길과 밤바다와 오래된 삶의 흔적들과 노랫소리와 추억을 되씹으며 재잘재잘 나누던 얘기와 무엇과 무엇들. 이틀 밤 사흘 낮 동안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우리들의 시간을 무지하게 높이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