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잎의 영혼이 신록으로 피어난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이 희망임을 신록이 말해준다.

by 벽우 김영래

무채색의 계절이 잠에서 깰 때는 아주 격정적이다. 나 돌아왔다고 떠들썩하게 원색을 다 동원한다. 노랑은 샛노랗고, 빨강도 샛 빨강에 흰색은 눈멀도록 빛난다. 산 초입 갈색의 줄기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봄은 생강나무와 산수유, 개나리가 그렇고, 동백은 말할 것도 없고, 분홍 팝콘 같은 박태기나무 꽃과 진달래, 영산홍. 싱거운 꺽다리 키를 자랑하는 빛나는 목련까지 일제히 깨어난다. 새로운 계절은 도드라지고, 강렬하고 화려하게 카메라 렌즈의 아웃포커싱처럼 주변 풍경을 지워내고 자신만을 부각시키며 귀환을 알린다. 걸음마를 갓 배운 아기처럼 성급하기가 아슬아슬, 조마조마하게 잎을 내기 전에 꽃부터 피워낸다. 때론 짓궂은 계절의 심술로 눈(雪)과 추위에 갇히기도 하면서 거꾸로 가려는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시간을 믿는 계절은 여전히 꿋꿋하다. 그래서 믿음이 간다.


봄을 맞는 자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도 그 믿음에 답을 하듯 이래저래 설레는 가슴을 안고 산천을 마구 뛰어다닌다. 바람이야 봄이 감내해야 할 업보 같은 것이니 있는 듯 없는 듯 견뎌내고 함께해야 할 친구처럼 같이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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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열흘 붉던 그 꽃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만 튕겨 놓고 그 많은 꽃잎들은 빛바랜 채 땅에 묻힌다. 그리고 그 원색들이 뭉쳐서 다시 하나로 태어난다.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불러온 남동풍처럼 바람의 방향이 일순 바뀌고, 봄의 향연도 바뀐다.


신록. 처음 잎새는 순하고 여려서 고양이 털처럼 부드럽다. 덜 마른 잎새의 물기가 햇살이라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난다. 노랑, 빨강, 연분홍에 흰색이 찰흙처럼 뭉쳐져 새로운 연두로 피어난 것이다. 연두는 너무 여려서 사랑보다 연민의 감정을 더 빨리 발동시킨다. 연두는 안타까움이나 그리움 같은 불안정한 서정은 아니다. 희망에 가깝다. 아니 그냥 희망이다. 연두를 보면 미래가 밝게 빛날 것 같고,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지가 불타오른다. 그래서 봄의 산천은 온통 희망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봄의 산천을 만나러 부지런히 떠나는 이유가 그 기운을 얻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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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의 꽃이 떨어지고 나서 잎을 낸 나무와 풀들은 계속해서 꽃을 피운다. 연분홍의 철쭉과 지천에 널린 샛 노란 애기똥풀과 양지꽃, 노랑제비꽃, 짙은 보랏빛 애기 붓꽃과 제비꽃 등등.

그늘이 그리워 질만큼 햇살이 뜨거워질 때쯤이면 이 꽃들도 다시 흰 빛으로 바래며 땅으로 떨어지고 나면 더 짙은 신록으로 튼튼하게 변해간다. 가끔은 그늘에 덮여 잎이 어두워졌나 착각이 들지만 사실은 원색의 꽃잎 영혼이 베어난 때문이다.


산 초입의 아카시아 군락은 온통 자신들의 세상인 양 백색의 꽃과 짙은 향기로 일주일간 광란의 축제를 즐기고 순식간에 누렇게 불탄 영혼으로 사라진다. 그러면 5월의 산들은 또 한 걸음 더 깊은 신록으로 물든다.


계절이 깊어질수록 신록은 청년처럼 튼튼하게 자란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햇살에 비치는 신록은 물비늘처럼 싱그럽고 싱싱하게 반짝반짝 빛난다.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황홀한 자태를 마주하는 오후 산책길에서는 새로운 삶의 희열을 맛볼 수 있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이 희망임을 신록이 말해준다. 이 계절의 신록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들 곁을 지키며 희망의 열매를 키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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