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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Nov 22. 2022

무섬마을 건너고, 걷다

좁은 다리 위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집중하는 순간 생각이 없어진다

  가까운 곳에도 내가 알지 못하고 가보지 못한 여행지가 꽤 많이 숨어있다. 그러고 보면 집 밖이 다 여행지인 셈이다. 가깝고 걷기 좋은 부석사나 소수서원을 몇 번씩 다녀오면서도 곁에 있는 무섬마을의 존재를 몰랐었다. 마치 조선시대 중간쯤을 살고 있는 마을 같다.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걸린 해우당이니 만죽제 같은 근사한 집 이름은 금방 잊어버려 기억하려는 노력이 별 의미가 없지만 여행지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오래도록 기억된다.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는 자동차 한 대가 간신히 건널 수 있을 만큼 좁고 낡았다. 그럼에도 마치 외나무다리처럼 서로를 배려하며 기다려야만 비로소 건널 수 있다. 당장은 불편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상대방을 기다리기만 하면 쉽게 해결할 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정보 홍수시대를 살고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지 않은 것인지 취사선택하기에도 버겁게 많은 것들을 시나브로 알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은 빌 틈 없이 무언가로 계속 채워지고 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무용과 유용의 정보들을 차단할 방법은 스스로 옭아매고 있는 정보기기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는 길 뿐이고, 그중 하나가 바로 여행이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열정적으로 여행을 가고, 운동을 하고, 캠핑을 떠나면서 비움을 실천하고 있다. 주말에 집에 안주만 한다면 다가오는 일주일의 시간이 너무 버겁지 않을까.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전경


  삼면이 강으로 휘돌아 나가는 물돌이 마을, 무섬마을의 앞마당 풍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크지 않고, 사람이 많지 않아 좋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정보 폐해로 인해 쌓인 심신의 노고를 풀어 던지기 좋을 만큼 넓게 트여있고,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칠 걱정 없는 적당한 간격으로 만날 수 있다. 

 

  모래벌로 가득 찬 강 가운데 조금만 또 다른 강을 만들며 겨우 흐르고 그 위에 놓인 외나무다리 건너기와 전통가옥이 즐비한 뒷골목을 걷는 한적한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다.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외나무다리는 폭이 30센티 밖에 안돼 좁아 불편하고 때론 떨어질까 불안하기도 하고, 연세 드신 분들에겐 위험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참 인간적이다. 

  외나무다리는 뛸 이유도 없지만 뛸 수 없으니 걷고, 혹여 중심을 잃고 떨어질까 몸을 움츠려 작게 긴장하며 집중하고, 안전하게 가기 위해 느리게 걷고, 마주오는 사람이 있나 멀리 살피며 기다리고, 양보하며 걷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다리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처럼 양보 없이 마주 선다면 물에 빠지거나 영원히 갈 수 없는 길이 되는 곳이다. 드문드문 만들어 놓은 자리에서 한 번은 기다리고 한 번은 양보받으며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인사하며 강을 건넌다. 주고받는 짧은 한 마디가 뜬금없이 사람들을 정겹고 다정하게 바라보게 해 준다.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다리를 건너갔다 오면 전통가옥이 즐비한 마을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늦가을 단풍이 든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40여 채의 한옥이 늘어선 마을 뒷길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가끔 만나는 출입금지 팻말에는 원주민들의 이방인에 대한 불편한 호소를 만난 듯해 미안해서 발걸음이 더 조심스러워진다.  

  단풍 든 갈잎 나무를 배경 삼아 위엄 있게 솟아있는 기와지붕과 해 질 녘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은 빛바랜 갈색 나무 대문과 텅 빈 툇마루의 가옥을 보고 있으니 나그네가 되어 하룻밤 머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런 연유 때문이지 무섬마을엔 한옥 민박이 많이 운영되고 있었다. 언제 한 번 그곳에 머물며 더 깊고 느린 고요 속에 묻혀 보낼 계획을 세워본다.        





  점심을 먹고 느직하게 출발한 한나절에 불과한 무섬마을 여행에서 비교적 많은 느림과 여러 번의 짧은 기다림으로 보낸 시간이 어느 때 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쳇바퀴 돌 듯 정해진 루틴을 채워가는 궤도를 벗어나 자유롭게 보낸 시간이 다시 시작하는 한 주를 맞이해서 살아내고 견디고 또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벌었다. 


  언제나 반짝이는 새것들만이 빛을 내는 것은 아니다. 때론 많은 시간들이 쌓여 만든 낡은 고풍들이 속 깊은 곳에서 값지게 빛나는 때도 있다. 무섬마을을 건너고, 걸으면서 고귀한 빛을 발견하고 마음속에 담아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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