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풍경이 만들어 준 반전 여행의 행복

기차 타고 간 부산여행.

by 벽우 김영래

1.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지난번 친구들과 다녀온 부전시장, 광안리, 동백섬과 해운대를 돌아보는 기차여행 코스가 너무 좋아서 다시 가게 되었다.

일정과 동선이 단조롭고, 특히 차를 가져가지 않는 코스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운전을 하지 않으니 주변 풍경을 맘껏 즐길 수 있는 데다, 가고 싶은 곳을 갔다 오고 싶은 곳으로 올 수 있어, 차를 이고 다닐까? 주머니에 넣고 다닐까 하는 주차 걱정이 없어 걱정을 허비하지 않는 것도 맘에 들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한 가지가 있다면 차를 가지고 가면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을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나게 된다는 것이지만, 그것도 다 운이고 여행의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면 괜찮다.

2.

여행하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람과 어떤 풍경을 만났을까?


ktx 열차를 탔을 때 의자 주위로는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옆자리엔 모르는 사람이 앉을 확률이 없으니 어색한 우연과 불편을 마주할 염려는 없었다. 자동차와 기차여행의 차이는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가 앉은 좌석을 중심으로 앞에는 빈자리였고, 통로 건너 대각선 창가 자리에 한 사람이 있었다. 뒤에는 우리보다 한 두 살은 더 있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중간중간 타고 내리며 사람들이 스쳐갔고, 여객전무가 가끔씩 다녀갔을 뿐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던 두 사람이 첫 번째 우연으로 다가왔다.

짝짝짝.

뒤에 앉은 여성의 규칙적이고 일정한 패턴이 마치 기계가 톱니바퀴를 물고 돌아가는 것처럼 들리는 껌 씹는 소리. 이어폰을 끼고 있어도 중간중간 빈 소절의 여백을 틈타고 선명하게 들렸다. 여행 기분을 망치지 않길 바라며, 빨리 종착역을 고대했다. 나중에 그녀와 헤어져서 우리는 그녀의 턱을 걱정하며 한바탕 웃었다.

대각선 창가 쪽에서 다리만 비켜 보이는 이의 허벅지가 쉴 새 없는 떨렸다. 영주부터 경주까지 내내 떨렸다. 얼핏 들린 전화 통화소리가 면접과 관련된 용어였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의 다리 진동은 면접관 앞에서 멈췄을까? 별개 다 궁금했다.


부전시장은 평일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복잡했다. 명란김밥을 사서 어묵카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갔지만, 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기억이었다.


광안리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는 마스크를 낀 중년 여성이 뜬금없이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큰소리를 지껄여 댔다. 혼란한 정신에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우리도 침묵했다.

목발 짚은 여성의 간절하고 애닮은 목소리로 천 원만 달라고 간절한 호소도 들렸다. 그녀가 내 앞을 지나는 동안 동정과 배려, 무시와 의심 등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마음이 좋지 않은 지나침이었다.

그녀의 하루는 어땠을까?


사소한 것들을 상상하고, 궁금했던 모든 것들은 운전을 하지 않고 보낸 잉여의 시간에 부과된 사색으로 여겼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수선하고 낯선 불편함이 있는 별거 없는, 혹은 망쳐진(?) 여행담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을 단번에 지워준 여행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3.

호텔에 도착했다.

광안대교가 정면에 펼쳐진 호텔 프런트에서 일하는 직원은 친절했다.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을 보면서 일하는 사람은 행복할까? 호주에 갔을 때 오페라 하우스 주변을 러닝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관광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일상이면 우리의 보통 일상과 같겠지.

그 사람들은 그곳을 벗어나 새로운 풍경을 찾는 여행을 꿈꾸겠지.

그래서 세상은 다른 것과 다른 것들이 어우러지는 오묘함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4.

넓은 통창에 광안대교가 정확한 수평을 이루고 딱 정 중앙에 자리한 호텔방에 들어서는 순간 잠시 말을 잊었다. 바다 위에 놓인 철교 하나가 만들어내는 이국적인 풍경이 바다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풍경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사진을 찍으려 쪽창을 열었더니 파도 소리와 자동차 소음이 들어왔다. 창문을 닫으니 소음이 차단된 고요한 세상이 되었다. 두 세계가 유리를 경계로 다르게 존재하고 있었다.


대교는 이층으로 만들어져 각각 한쪽 방향으로만 차들이 통행하고 있었으며, 멀리 있어서 장난감처럼 작고 어렴풋이 보였다. 버스가 지나갔고, 지붕만 간신히 보이는 승용차와 사각의 긴 컨테이너 화물차도 오갔다.

차가 밀려서 여러 대가 줄지어 선 채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밤에는 화려한 불빛이 시시각각 변했으며, 작은 요트들이 무리 지어 몰려와 꼭 대교 밑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여행자들을 위해 만드는 풍경을 여행자들이 볼 수 있도록 배려하듯이.


왼편으론 화려하게 핀 꽃송이를 연상시키는 아파트가 보였다. 이곳의 랜드마크로 누가 봐도 여기가 어디인지 한 번에 알 수 있게 했다.

호텔방은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커피를 제공하는 카페가 되었다.

창 밖의 압도적 풍경이 낮에서 밤으로 그리고 다시 아침으로 바뀌는 내내 계속 좋았다.

오늘 만나서 좋았던 혹은 불편했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모두 추억으로 만들어 버리는 너그러움은 덤으로 제공하는 듯했다.

그리고 새로운 내일은 또 어떨까 하는 기대를 품게 했다.

5.

다음날 아침엔 누군가 지켜볼 심심한 해변의 풍경이 되어 주는 산책을 했고, 방으로 돌아와 멋진 뷰를 보며 커피를 마셨다. 퇴실시간까지 뭉개고 앉았다가 간신히 털고 일어나 택시를 타고 동백섬으로 갔다.


금방 터질 것 같은 꽃망울을 간직한 동백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걸으며 누리마루를 거쳐, 갈맷길을 걸으며 해운대까지 갔다.

하늘과 바다가 온통 기분 좋은 코발트로 가득히 빛나고 있었다.

내 마음속 희망과 설렘도 기분 좋게 코발트로 절임 되었다.

6.

계획 없는 단순한 여행의 본질이 진정한 힐링임을 비로소 알게 됐다.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 특별한 계획을 짜지도 않고, 오직 하나의 풍경에만 집중했던 나머지 어쩌면 심심했던 여행.

그래서 기차에서, 거리에서 우연히 어깨를 스치고 지나쳤을 모르는 사람들과 광안대교가 이층 도로인지 처음 알게 된 별로 쓸모없는 지식(?)조차 살뜰하게 챙기는, 소소한 것들을 기억할 만큼 단순했던 시간.


특별한 게 없어 쓸쓸했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심심했고, 그래서 실패한 여행담처럼 들릴 수 있는 얘기를 나는 왜 행복해할까.

평온했고 즐거웠다는 반증이 아닐까?

또 가자고 하면, 언제고 기쁘게 길을 나설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사람은 사람에게 기대어> 저자 김영래, 부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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