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한 줌, 기슭에 두고 온 백두산

by 벽우 김영래

시공이란 신비로운 것이다. 나의 모양을 변화시키고, 전혀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로 떨어져 있던 배추와 무, 고추 등 양념이 버무려져 맛있는 김치가 되듯이. 여행은 나의 시공이 아닌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함으로써 단박에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만들어 준다.

내 나름대로 생각한 여행의 정의는 ‘새로운 시공에 뛰어들어 나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유쾌한 사건’이라 하고 싶다.


알람을 맞춰 놓으면 반드시 울리기 전에 깨는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내 신체리듬을 특허라도 내야 하나. 아침 5시 반에 맞춘 알람이었지만 5분 전에 시간에 눈이 떠졌다. 설렘에 비하면 잠은 잘 잤다.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케리어를 끌고 버스에 올랐다. 따단다 따~ 따단다 따~ 슈베르트의 ‘송어’ 피아노 곡에 맞춰 무도회장 입장하듯 나만이 주인공인 것처럼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공항은 여행자에게 늘 최고의 설렘 공간이다. 시작이며 종착점이다.

웅장한 굉음으로 단번에 허공으로 몸을 들어 올린 비행기는 잠시 뒤뚱거리다 이내 안정을 찾았다. 간단한 기내 식사와 차를 마시고 나니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땅으로 내릴 준비로 분주했다. 고도가 낮아지며 심장 뒤편 어디 한 곳이 몸에서 분리되며 따로 노는 듯 울렁했다. 그리고 미지의 땅에 닿았다.

대련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인천과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지 월미도와 짜임새가 비슷했는데 공원 규모는 훨씬 컸다. 가이드는 중국 여행에서의 화장실은 매우 중요하다며 여정을 소개할 때마다 항상 빼놓지 않았다. 중국의 대략적인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요약식으로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중국의 불가사의 3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음식 종류가 많아서 다 먹어 볼 수가 없고, 언어가 많아서 다 알아들을 수가 없고, 땅이 넓어서 다 둘러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가히 중국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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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면서 서너 시간 달렸던 고속도로를 나와 새로운 도시를 만났다. 화려한 불빛으로 단장하고 있는 신단동시였다. 제일 먼저 중조친선교가 보였다. 북한과 교역을 담당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압록강 건너의 어둠 속에서 어쩌다 반짝이는 별빛 같은 불빛 한두 점만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북한 땅이었다. 창밖의 스치는 풍경만을 따라가며 말없이 한참을 보았다. 단동역 광장에서 마오쩌뚱의 동상이 보이는 주점(호텔을 주점이라고 했다)에서 여정의 첫 짐을 풀었다.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해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6.25. 전쟁의 역사현장인 압록강 단교를 둘러보았다. 단교는 중국 쪽에 반 정도가 보존되어 있었고, 북한 쪽은 교각만 남아 있었다. 철교각의 어디쯤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에서는 전쟁의 상흔을 전혀 짐작할 수도 없는 잔잔한 평화의 음악이 흘러나왔지만 끊어진 다리 끝부분에는 포탄의 흔적이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해안으로부터 밀물이 강을 역류해서 왔다가 밀려가는 소용돌이 속에서 흙탕물이 일었다. 마치 우리 민족의 분단 역사가 아직도 혼란스럽게 방황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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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장성을 지나 산 모퉁이를 돌자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 불과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 강둑을 지났다. 힘 있는 사람이 폴짝 뛰면 이쪽저쪽을 모두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철조망이 가르고 있었다.

1874년 미국의 어린 목동이 양 떼가 장미덩굴을 피해 달아나는 것에 착안해 만들었다는 철조망이 지금 이곳에서는 땅과 사람들 구분 지어 갈라놓고 있다. 어린 목동이 철조망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이 국경선엔 6월의 빨간 장미꽃이 장관을 이루며 피어있지 않을까? 가당찮은 상상력인가.

다음날 백두산 등정을 위해 산에서 가까운 도시까지 이동해서 한림원(호텔)에서 짐을 풀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지친 일행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들기 전 소소한 일상들에 일희일비하느라 잊고 지냈던 70여 년의 민족분단에 관한 아쉬움과 안타까운 생각들이 떠올랐다.


백두산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도로는 포장과 비포장이 불규칙하게 나타나며 차가 심하게 흔들리기도 했고, 가끔씩 공사구간이 겹쳐 마주 오는 차를 기다느라 시간을 지체되었다. 백산시를 거쳐 오전 내내 달렸다. 백두산이 가까워 올 수록 계절은 여름에서 초봄으로 역주행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어제는 눈이 많이 내려 백두산 탐방이 어려웠다’고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가 한 공간에 퇴적층처럼 쌓여 있는 신비한 백두산. ‘겨울에는 봄의 길을 떠올릴 수 없었고, 봄에는 겨울의 길들이 믿어지지 않는다 ‘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 표현이 여기서는 맞지 않았다. ‘아낙네의 살결보다 흰 자작나무의 수해’가 창 밖으로 스쳐 지나면서 점점 더 가까워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길은 끝없이 곧게 뻗어 있었고, 고저만 있을 뿐이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산문 아래 호텔에 도착했을 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6월인데도 산 정상에 눈이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긴 팔 옷을 하나 더 꺼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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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매표소에서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산 정상을 위해 한 시간 좀 넘게 달렸다.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숲은 점점 사라졌고, 나무가 없는 고산지대는 마치 평야처럼 보였다. 야생화와 흰 구름과 안개가 겹쳐서 이국적이었다. 드디어 버스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정상은 말할 것도 없이 산 전체가 안갯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어서 어디가 산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호흡이 가빠왔다. 약간의 저산소증과 백두산이라는 흥분에 바쁜 발걸음이 더해 심장은 요동쳤다. 연신 거친 숨을 토해내며 한 계단 한 계단 걸음을 옮겼다.

백두산에 오면 뭐라도 하겠다며 생각나는 대로 짧은 몇 문장을 나눠 메모를 했다. '정상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곳', '백두산은 여기서 하늘이었다'. 가쁜 숨 속에서 새로운 감성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안개처럼 하얀 머릿속에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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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442계단을 다 올랐다. 운무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칼처럼 매서운 바람만 불고 있는데도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백두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랬다. 안갯속에 가려진 천지를 바라보면서 가슴은 뿌듯했다. 마음으로는 다 보이는 듯했다. 오른쪽 장군봉을 비롯해 크고 작은 봉우리가 감싸 안고 있는 쪽빛 천지의 평화로운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백지 같은 안갯속 천지를 생각하며 잠시 동안 묵상했다.

몇몇은 먼저 내려갔고, 몇몇은 아쉬움에 뭉그적거리다 마지못해 내려오는데 저 멀리 오른쪽 산 등성이 열렸다. 운무가 없는 빈 공간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공간이 그대로 옮겨진다면 천지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려 위로 뛰었다. 한 50여 미터를 올라가니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천지가 보였다. 아주 잠깐 안갯속에 짙푸른 얼굴을 빼꼼 보여주었다. 한참을 내려가다 다시 뛰어올라가 한번 더 보고 나서야 비로소 맘 놓고 내려올 수 있었다. 내려오는 내내 흑백사진 같은 단아한 천지의 얼굴이 가슴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리움 한 줌 움켜쥐고

단숨에 올라

바람에 실려 온 듯

드디어 그대 품에 안겼다.


아!

아쉬움 놓을 수 없어

수많은 발자국 총총 다녀간 곳에

발자국 또 하나 찍고

바람 살짝 비켜가는 기슭에

내 그리운 맘 덜어 놓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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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쇼핑센터에 들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하는 광고 카피를 떠올리며, 꼭 사지 말아야지, 정말 아무것도 사지 않을 거야 하면서 들어갔다. 그런데 유혹의 기술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처음 마음은 어디 가고 주머니가 들썩거렸다.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건 돈이 없거나 인정머리 없는 신처럼 단단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합리화 해 버렸다. 건강에 좋다는 찜질팩, 죽섬유로 된 손수건 2장, 여자들 머릿수건 2장 등등. 아내가 좋아하는 표정이 눈에 선했건만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책상 한 귀퉁이에 그냥 올려져 있으니 그때의 작은 소망이 무안해진다.


집안으로 이동해서 고구려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 유적지를 돌아봤다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 그리고 오희분 5호 묘 내부를 둘러보았다. 관리상태가 허술해 내부는 습기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심지어 물이 흐르는 곳도 있었다. 광개토대왕비는 커다란 유리벽에 갇혀 관람객의 사진 촬영도 금지하고 있었다. 왕릉은 잡초에 뒤덮여 있고 돌무더기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게 과연 고구려 최고의 영광을 이룩한 왕의 무덤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라했다. 장수왕릉은 보존상태가 좀 나은 편이었지만 받침돌이 사라진 부분에서 조금씩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고구려 역사가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이라는 왜곡된 계획을 통해 자신들의 소수민족 역사로 편입시켜 놓았단다. 민족분단의 아쉬움이 비가 내리는 와중이라서 더 무겁게 다가왔다. 고구려 역사유적을 둘러보면서 자부심보다는 비애감이 더 컸다. 역사에서의 후회와 가정은 참 부질없는 짓이지만 자꾸 되돌아보는 건 인지상정인가 보다. 아쉬움이 너무도 크니까. 일제에 침탈당하지 않았더라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고, 간도협약으로 만주 벌판을 중국에 내어주는 일도 없었겠지.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주도했더라면. 생각이 열차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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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쉬움이란 끝이 없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흘러 후손들의 역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단 하나의 결정도 가벼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바로 역사임을 인식하고 책임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돌아오는 버스 차 창밖으로 스쳐 지나는 하나하나의 풍경들이 여행의 감흥으로 다가왔다. 드문드문 시골길을 걷는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일상의 애환을 가슴에 담고 있을 것이며, 시골 철교 밑 토기 공장에 가득 쌓인 메이드 인 차이나 상표의 화분은 나도 모르게 우리 집 거실에 있게 될 수도 있겠지. 드넓은 대지의 논 한가운데서는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 메마른 옥수수밭에 물을 길어다 붓는 아낙네, 노을 지는 공원에서 체조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

시골집 대문엔 복(福)과 부(富)의 붉은 글자가 빠짐없이 붙어 있다. 중국인의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붉은색이란다. 아파트나 큰 건물의 옥상엔 붉은 글씨들이 쓰여 있었고, 자동차 바퀴에도 붉은 천이 묶여 있다. 건물 앞 해태 상 목에도 감겨있고, 심지어 새해에는 남녀 모두 붉은색 속옷을 입는다고 하니 붉은 기운을 믿는 그들의 비원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엿볼 수 있다.

드넓게 펼쳐진 대륙의 산하는 온통 옥수수 밭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대지에 심긴 옥수수는 중국 인구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씨앗임에 틀림없다. 집집마다 마당 한편에 자리 잡은 창고엔 춘곤기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넉넉히 쌓여 있었다. 옥수수 한 알의 씨앗이 품어내는 생명 잉태 능력이 바로 인류를 지켜 준 힘인 듯했다.


이렇게 끝에 서 보면 다녔던 발걸음의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을 가족, 직장에서 떠나 있으니 가까이 있어서 잊고 있었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프랑수아를로르의「꾸뻬씨의 행복 여행」에서 주인공은 많은 행복한 것들을 여행 속에서 찾았다. 돌이켜 보면 나의 여행도 언제나 행복했다. 긴 시간 백두대간 여행을 함께해준 사람들과의 소중한 추억은 두고두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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