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세모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면 반짝이는 조명과 노랫소리가 추위보다 더 후끈 달아오른다. TV에서는 연예대상, 가요대상 등 시상식으로 정규방송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절정은 마지막 날 보신각에 모여 카운트 다운을 하고 새해가 되는 바로 그 시각에 맞춰 희망의 종이 중후하게 울린다. 아침 뉴스에서는 푸른 공기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과 그 앞에서 환호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장면이 데자뷔처럼 나온다. 매년 다른데 매년 똑같다.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뭔가. 어떤 공간에서 재각 재각 울리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럼 어제의 아홉 시와 오늘의 아홉 시는 그리고 천년 전의 아홉 시와 천년 후의 아홉 시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미국의 아홉 시와 한국의 아홉 시, 태평양 바다 위의 아홉 시와 저 하늘 끝 우주의 아홉 시는 어떤가. 모두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다 같은데 다 다를 것 같다.
사람들은 계산을 하기 위해서 경계를 구분 짓지 않았을까. 하루의 경계를 쌓고, 일 년의 경계를 짓고, 십 년, 백 년의 경계를 만들어 삶을 계산하지 않았을까.
어제와 같은 오늘이 되었다. 나는 기해년을 보냈고, 경자년 새해를 맞았다. 귀찮니즘의 절정으로 말미암아 나는 아파트 거실에서 조차도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를 맞지 않았으며, 그냥 블라인드 너머로 날아드는 희미한 새벽의 기운을 보았을 뿐이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새해, 새해 하니까 나도 뭔가 새로운 기운을 받고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쉬고 아내는 빨간 날에도 여느 날과 똑같이 일을 해야 했다. 새해 첫날이라 뭔가 새로운 계획이나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었지만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이었고, 찌개를 데워 상위에 놓는데 플라스틱 냄비받침이 좀 비틀어져서 식탁 유리에 둔탁하게 부딪쳤다. 문득 그놈이 눈에 들어왔고, 투둑 하는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얼마나 냄비 바닥이 뜨거웠으면 둥근 모양의 저 놈이 저렇게 비틀어졌을까. 피할 틈도 없고, 엄부렁을 부릴 줄도 모르고 그냥 뜨겁게 뜨겁게 견딜 수밖에 없는 그놈의 운명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그럼 난 저렇게 뭘 견뎌 본 적이 있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했던 안도현 시인의 물음처럼 나는 나에게 다가온 견딜 수 없는 그 뜨거움을 진득하게 견뎌주며 누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 본 기억이 있는가. “네”라고 답할 만큼 자신은 없다.
작심삼일이 대부분이고 끊기와 노력의 부족으로 나의 플래너는 앞에서 서너 장만 채워진 채 신년 플래너 앞에서 풀 죽은 모습으로 재활용품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기를 수 십 년째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만들어진 시간의 경계가 있으니 송구영신은 매일매일 해야겠다. 냄비받침처럼 오늘을 치열하게 견디며 지켜내고 다시 오는 내일도 뜨겁게 견디며 살 각오로 맞자. 지금까지 보고 마음에 새겼던 그 많은 경구들 위에 내가 만든 새로운 경구로 덧칠하자.
오늘부터 나도 냄비받침처럼 살자. 견디고 지키고 겁 없이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서 날마다 송구영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