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의 시간처럼 달콤한, 휴일

고요한 공간 위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여유로

by 벽우 김영래

저녁부터 이미 좋다 낼 아침이 휴일이라서. 잠자는 동안에도 꾸준하고 성실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고 아쉽다. 그럼에도 반복된 지난 5일의 시간 위에 길들여진 몸은 그 아쉬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꺼풀이 무겁게 덮여온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새벽 일찍 눈이 떠져도 상관없다. 누워서 마냥 비비적거려도 된다. 금방 밥을 먹어야 하고 뭘 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달콤한 시간이다.


시간 위에 설정된 규정들에 얹혀 살아가다 보니 하루하루의 의미가 남다르다. 매일 출근하는 아침과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시간으로 정리된 휴일의 아침 시간은 여유와 평화가 넘친다. 특히 코로나 19라는 재난적 상황이 가져온 셀프 감금의 속박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여유로 넘치는 아이러니. 춘삼월이면 쏟아져 올 청첩장과 각종 모임, 여행 계획 등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자유롭게 되어 버렸다. 결혼을 앞둔 청춘 남녀나 생계를 위협받는 이들에게는 몹쓸 소리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피곤에 지친 직장인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위를 흐르는 달콤한 시간이 11시 15분을 가리킬 때까지, 동남향의 아파트 거실로 투명한 봄 햇살이 스펀지에 물 스미듯 고요하고 따뜻하게 베어 들 때까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다만 허리가 아파서 일어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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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청소를 했다. 구석 - 벽과 화분 사이, 소파 다리와 방바닥 틈새, 안방 침대 머리맡과 협탁 아래, 의자 밑, 식탁과 냉장고 뒤 등등 - 바람이 휘돌아 아이들 숨바꼭질 놀이하듯 끊임없이 숨는 지긋지긋한 먼지들과의 한판 승부를 위해서 걸레를 들었다. 이것도 병인가 싶다. 일요일은 한 번쯤 그냥 넘어갈 때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뭔가 아쉽고, 찜찜하다. 거실 유리창으로 받은 빛만큼이나 투명하고 말끔한 방바닥 모습을 보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니 말이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선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윤종신의 <좋니>, 임창정의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등등의 달달한 노래들이 파도를 타고 연속으로 들려왔다. 노래가 시간을 더 여유롭게 만들었다.

아침밥은 귀리를 넣은 고슬고슬한 밥에 새싹채소를 얹고 계란 후라이드와 참기름을 넣고 막된장으로 비빈 비빔밥에 브로콜리와 쑥 냉잇국을 곁들여 먹고, 후식으로 토마토 서너 개와 사과 반쪽을 먹었다. 이렇게 매일 먹으면 백수, 천수를 하겠지만 요즘 들어 다시 재발 기미를 보이는 장염 때문이며, 적당히 병을 속이려니 할 수 없었다.


거실에 앉아서 뿌듯하게 집 안을 둘러보는 만족스러움에서도 한 가지 서운한 게 있다. 너무 눈부셔 슬프고 원망스럽기까지 한 것은 봄 빛을 즐기지 못함이다. 정확히는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안 한 것이었기에 위안이 되었다. <키스>의 시간이 오후로 넘어 간 때라 설탕물 빠진 껌처럼 질겅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봄맞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어제 시골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 드렸기에 걱정을 놓고 있었는데 뭔 일이 또 생겼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어제 쑥을 뜯어서 쑥버무리를 했는데 야들야들한 게 맛나다. 시간 나면 갖다 먹어라"

다행이었다. 밀가루를 넣고 섞어 찐 건데 씹을수록 쑥향이 나는 게 맛이 괜찮았다. 의림지 어디쯤 햇살 좋은 벤치에 앉아서 먹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의림지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처럼 생각하고 나왔을 터다. 시내와 가깝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봄을 즐기기엔 딱 맞는 곳이었다. 응달진 산책로는 쌀쌀한 듯도 했지만 햇살로 나오니 금세 따뜻했다. 공사를 멈춘 현장 가운데 있는 분수도 하늘로 물을 뿜고 일곱 색깔 무지개를 띄웠다. 햇살을 지고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손에 드니 고소한 향기와 따신 등이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잔디밭에 날리는 비눗방울과 아이들 웃음소리, 파란 하늘을 이고 막 꽃망울을 틔우는 자목련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니 이백의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란 시구가 이를 두고 한 말인 듯.


늦은 점저(점심과 저녁 사이의 끼니)를 먹고 다육 농장에 들러 눈요기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키스>의 휴일 시간은 유효하게 흐르고 있었다. 휴일 청소의 기쁨은 외출 후 귀가 때 그 가치가 폭등한다. 반짝이는 마룻바닥과 순백의 변기와 세면대, 구피 어항 속의 한가로운 유영. 건물에 가려 응달진 빛으로부터 어둠이 스며들 때까지 달콤한 휴일의 여유와 평화는 계속되었다.

잠들기 전 낼 아침이 다시 월요일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지만 완전한 휴일 시간을 보냈기에 기쁘게 맞이할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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