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해시켜줘. 제발
책상엔 주로 소설책, 에세이 등 인문학 서적들이 많다. 가끔 그림을 그리고 싶어 그림에 관한 책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글을 쓰고 싶어도 마음만 있을 뿐 노트북을 여는 게 죽는 것보다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때엔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물을 살피고 연필로 명암을 넣고, 이리저리 선을 긋다 보면 모든 희망과 모든 실망을 다 잊는 무념무상의 세상에 빠져든다. 천재적인 재능 따윈 상관없다. 보이는 대로 그리라는 아주 당연한 조언에도 지진이 난 것처럼 길이 엎어지고, 건물이 기울어지는 모습이어도 괜찮다. 선(禪)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집중의 놀라운 효능은 망각에 있다. 산만하고 떨어지는 집중력엔 최고의 명약이 그림 그리기다.
소설도 지금은 하도 꽈서 당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소재도 동성애나 젠더폭력 등 자극적이고 내가 혐오하는 것들이니 관심도가 떨어지고 완독 횟수도 줄어든다. 가볍거나 혹은 무겁더라도 인간적이거나 사회변화를 위한 문제제기들은 이해하겠는데 왜 그런 것들에 병적으로 집중되지는. 종편이 생기면서 잔혹한 소재를 다루는 드라마도 앞 다투어 방영된다.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 등의 소재를 다루면서 잔혹한 장면들이 실제처럼 분장되고, 여과 없이 표현될 때 무서움에 진저리가 쳐진다. 감추는 것보다 드러내는 것이 더 낫고, 현실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겠지만 꼭 그렇게 노골적이어야 하겠냐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 쉬운 게 없네.
쉽게 일상의 감성을 고르고 유지하며 가다듬으려 종종 시를 꺼내 읽는다. 김용택 시인이 엮은 꼭 필사하고 싶은 시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지방 신문사 주최 시전을 엮은 <아이 러브 포엠> 같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시들을 따라 적기도 하고, 외어도 본다. 깊은 내용이 아니더라도 짧은 한 줄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감동이 있다.
사막
오르팅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엊그제 배달된 문학지 시들을 읽다 멘붕에 빠졌다. 상징과 은유가 넘쳐 이게 글인지 *인지 구분을 못하겠다.(실제 작가들에게는 이런 표현이 무지 큰 실례가 되겠지만 내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이해가 안 돼 화가 났다.) 상징과 은유가 바닷속처럼 깊어 철학서 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내 능력이 얕아 더 화가 났다. 한 열 편쯤이니 꾹 참아야지. 넘길수록 화가 더 커져갔다. 평론가가 자세히 해석해 주어도 모를 뜬금없는 우주와 공룡과 비행기의 추락과 새와 사람들의 연결 고리가 어떻게 엮이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어떤 감흥을 받아야 내가 문학을 좋아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시를 읽다 시를 내팽개쳐 버리고 싶어 졌다. 그때 나의 인내심에 답해주는 시가 눈에 띄었다.
회사에 가야지
유병록
알람이 울린다
출근해야지. 무성한 마음은 집에 두고 회사에 가야지
늘 그랬듯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아무 마음 없는 것처럼
씻고 아침 먹고 집을 나서야지
신호 지키며 운전해야지
사무실에 들어서면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내 익숙한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해야지
지난 회의록 정리하고 다음 회의 준비하고
일 진행되는 사정 살피고
기획안 쓰고 결재 올리고 회의하고
여기저기 전화하면 점심시간이 되겠지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회사니까
슬픔을 나누는 일은 어색하니까
구원을 찾거나 함부로 조언을 주고받는 곳은 아니니까
여기에서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니까
회사의 온도는 늘 적당하지
공기는 늘 아늑하지
사람들은 모두 다정하지
오전과 별다르지 않은 오후
일하고, 또 일하면 퇴근시간이 되겠지
동료들과 인사 나누고 회사를 나서야지
집으로 돌아와서 무사하고 보람찬 하루를 마무리해야지
늘 그랬듯
아침을 기다리며 잠들어야지
그래, 출근해야지
눈물이 나기 전에 나의 아늑한 회사로 가야지
<문학동네 102호>
어디를 줄여서 인용하기가 어려워 전문을 옮겼다. 담백하고 솔직하며, 시간의 연결이 강처럼 자연스럽다. 게다가 회사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일상의 루틴과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비애와 숙명을 문장에서 바로 그림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단순한 사람이라 그런가. 앞에서 너무 과격한 표현으로 비난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 지식이 접시물 보다 얕고 삶에 대한 철학이 부족한 탓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래도 인내심을 발휘한 끝에 시를 읽다 시를 찾아 평정심을 얻어 다행이다. 이걸로 한 권의 가치는 내게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