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못 알아봐서 고마운, 첫사랑 5

by 벽우 김영래

동네 어귀에 들어서는 데 검푸른 하늘을 흐르는 은하수에서 큰 별똥별 하나가 휙하며 사선을 긋다가 사라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이별 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가'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깜짝 놀랐다.

“민주니?” 아빠였다. 그녀를 마중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놀랐다.

“아빠. 어떻게 나왔어? 힘들지 않아.”

“왠지 오늘은 자꾸 기분이 이상해서 나와 보고 싶었어. 넌 괜찮은 거지?” 지팡이를 짚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데다 숨이 가빠서 항상 가래 끊는 소리가 났는데 오늘은 좀 더 심하게 들렸다.

“뭐가. 난 늘 괜찮아. 근데 아빠가 마중 나온 게 더 이상하잖아. 처음이야.” 민주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빠의 상태가 더 나빠졌고, 며 칠 전 병원에서 의사가 한 말이 계속 걸렸었다. 폐기능이 약해서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질 수 있고, 그래서 다른 신체기능들이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데 특히 환절기에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는 지팡이를 잡은 아빠의 반대 손을 잡아 부축했는데 많이 떨리고 있었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잠시 멈춰 크게 숨을 고르고 다시 몇 걸음을 걷고 다시 숨을 몰아 쉬었다.

“민주야. 아빠가 네게 큰 짐을 지운 것 같아서 미안하다.”

“괜찮아. 아빠가 미안해할 거 없어.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 했잖아. 엄마랑 동생이랑 다 모여서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아빠! 조금만 힘내자.” 민주는 눈물이 났지만 아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더 크게 말했다.

며칠 후 수업을 하던 민주는 급하게 뛰어 온 담임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아빠는 숨을 거둔 후였다. 그동안 너무 힘들어했기에 잠을 자고 있는 듯 너무 평온한 모습에 더는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함께 만났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그녀에게 슬픔은 꼭 곱으로 오는 듯해서 가슴이 더 먹먹했다.



동현이는 그의 엄마가 편의점에 찾아온 이후로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어쩌다 마주쳐도 그냥 지나쳤다. 서희는 동현이가 나쁜 놈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공부만 열심히 하기로 했다고 약속했다며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학교 내에서도 소문이 쫙 퍼져 곳곳에서 그녀를 보며 수군거렸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예전처럼 학교 생활을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학교를 옮기는 날 마지막으로 그를 봤다. 가방을 챙기고 학교를 빠져나올 때 동현이가 정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한테 먼저 가라고 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동현이는 자기 엄마가 민주를 찾아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그녀를 만나면 이사를 갈 거라고 말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녀가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어제 서희를 통해 들었다며 자기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대학에 가면 꼭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괜찮다며 이번에는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처음 그와 악수를 할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민주는 엄마가 있는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곧 학교 생활도 적응했다. 그녀는 목표하는 대학에는 못 들어갔지만 지방의 국립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그냥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할까 생각했지만 아빠가 너무 슬퍼할 거라고 엄마가 말렸다. 엄마가 그녀에게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해보라며 격려를 해줬고, 이제 동생은 자신의 몫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빠가 실직을 했을 때도, 노동자 파업을 하며 투쟁하다 다치고, 감옥에 갔을 때도 엄마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려운 궁지 속에서 더 빛나는 엄마는 우주를 품었다고 생각했고, 그런 엄마를 보면서 그녀는 어려운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틈틈이 알바와 공부만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그것 이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가끔은 동현이의 생각을 했었지만 시간이 빛을 빨아버렸는지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말끔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가 그녀를 못 알아본 이상 그녀가 먼저 알은 체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카운터에 앉아서 잠시 동안 그를 힐끔힐끔 몇 번 쳐다보며 옛일을 떠올려 보았다. 참 좋았었고,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었지만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학 가던 날 교문에서 헤어질 때 모든 것을 잊기로 했기 때문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맘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몇몇 손님들이 더 들어와서 가게 안은 제법 시끌벅적 해졌고, 아홉 시가 좀 넘었다. 그들이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녀는 일부러 주방 쪽으로 비켜갔지만 시선과 신경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해 있었다. 그들이 나간 문은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두어 번 흔들리다 닫혔지만 그녀의 가슴에 돌덩이가 나 쿵 하고 떨어져 얹힌 든 무겁게 짓눌렀다. 미련을 갖지 않기로 한 자신이 이렇게 흔들릴 줄은 몰랐다.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사장이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아까 나간 손님이 이거 너한테 주라던데”하며 쪽지를 건넸다.

민주는 쪽지를 받아 들고 화장실로 가서 살며시 펼쳐 보았다. 글자는 꽤 크고 두툼하게 적혀 있었다.

민주야 너를 다시 봐서 좋았다. 네가 밝아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너도 나를 알아봤는지 모르겠지만 난 순간적으로 나를 못 알아볼 정도면 네가 열심히 잘 살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너와 처음 시작이 나에게도 너무 좋은 추억이었단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미안해서 다시는 널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너무도 슬퍼 보였는데 나까지 보이면 더 슬플까 봐 눈에 안 띄려고 노력했다.

오늘 용기를 내 너를 보러 왔다. 네가 못 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막상 날 못 알아보니 좀 서운하기 했다. 그날 느티나무 아래서 잡았던 네 손의 따스한 온기를 기억한다. 내게는 영원히 식지 않을 기억이다. 이것 또한 너에 대한 나의 이기심이고, 오만일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네 맘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길을 가면서 나중에 서로 편하고 떳떳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만나자. 오늘날 못 알아 봐줘서 고맙다. 나 이제 며칠 있다가 군대 간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늘 건강해라. 안녕.

민주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못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글이 자꾸만 생각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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