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못 알아봐서 고마운, 첫사랑 4

by 벽우 김영래

이제 그녀는 나무 밑의 어둠도 두렵지 않았다. 용기 내서 나무 밑으로 들어가 두 아름은 넘을 듯한 나무를 꼭 껴안으며 속으로 말했다. 터놓고 말을 할 수 있는 친구를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 속에서 저 멀리 마을이 보였다. 구부러진 길이 오늘따라 정겹고, 평화롭게 보였다.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반지처럼 동그란 띠를 두른 보름달이 비치고 있었다. 그날은 아빠의 바늘 같은 기침 소리도 평온하게 들렸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고, 이런저런 생각이 풍등처럼 피어올랐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아주 달콤한 꿈을 꾼 것처럼 아침이 상쾌했다.


술을 마시던 금수저 사내가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아는 듯 자꾸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womon in love'를 틀어 달라고 주문했다. 그들이 그녀를 아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운터로 돌아와 올드 팝 폴더에서 그 노래를 찾아 틀었다. 잠시 후 가게 안에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다.

음악이 퍼지자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던 추억이 뿌옇게 일어났다.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중2 학교 축제에서 그는 이 노래를 불렀었다.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찼고,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잠시나마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 준 곡이었다.

세수를 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그때의 추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줄줄 누수되고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 친구가 되기로 한 그날 이후 민주의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친한 서희는 그녀와 그가 친구가 됐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널리 퍼트렸다. 서희는 민주의 행복이 마치 자신의 행복인 양 기뻐해 줬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냥 친구라고 애써 선을 그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공부를 하거나 알바를 할 때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서희는 그녀가 낯선 곳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고마운 친구였다. 그녀가 서희에게 어제의 일을 얘기했을 때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고 기뻐하며 응원해 주었다.

“오! 민주. 대박. 갠 다른 여자애들한테도 정말 인기 많아. 근데 너한테 꽂힌 거야. 너 좀 멋진데.”눈빛을 교환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한 바탕 크게 웃었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10월 중순 청람 축제가 시작되었다. 그가 바브라 스트라 젠더의 「Womon in love」를 통기타로 연주했다. 가수처럼 정말 잘 불렀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졌다. 마치 그녀가 환호를 받는 듯했다. 노래가 연주되는 동안 그녀는 발로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인생이란 우주 속의 한 순간에 불과해요/ 꿈마저 잃는 다면 더욱 외로운 곳이죠/....... 좁고도 긴 인생길 서로의 눈길이 마주치고 사랑의 느낌이 점점 강해 질 때면/ 비틀거리고 넘어질 지라도 기대고 있던 벽을 떠나 내 모든 것들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노랫말 내용들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들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 속에 모래알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자신이 꿈마저 갖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녀는 있을 수 없었을 거라고.

그날 이후의 시간들은 그녀에게 깨끗이 닦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개운했으며 그곳을 투과해 들어온 햇살처럼 모든 것이 따뜻했다. 자신감도 더 커졌다. 늘 그가 뒤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의해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때는 아빠의 실직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졌을 때 모든 것이 싫고 미워서 죽고 싶기도 했는데 다시 이렇게 희망을 쏘아 올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는 자율학습 시간에 도망쳐 나와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서 그녀를 보며 공부를 하는 척하기도 했다. 공부가 잘 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함께 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고, 그녀가 주인 눈치를 보지 않도록 친구들을 동원해 편의점에서 간식을 대량으로 털어 주기도 했다. 주말엔 영화를 보거나 가까운 곳으로 놀러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달콤한 시간이 거의 1년 동안은 계속되었다. 모든 것들이 정말 정말 꿈같았다.


3학년이 시작된 어느 봄날. 가게로 어깨 위까지 단정하게 잘린 생머리에 하얀 얼굴에 금테 안경을 껴서 깐깐한 이미지가 풍기는 사십 대 후반이 넘어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반말로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민주니?”

“네?... 네. 그런데요.” 놀라고 어리둥절해서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긴 말 안 하겠다. 난 동현이 엄만데. 동현이가 요즘 성적이 많이 떨어졌더라. 내가 여기저기 좀 알아봤더니 너를 쫓아다닌다고 하더라. 그러니 이제 우리 동현이 공부를 좀 하게 해 주겠니.”

“네?.... 네” 그녀는 또다시 엉겁결에 네라는 대답만 했다. 다른 무슨 할 말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많이 본 듯한 장면에 자신이 서 있었다. 그를 만나면서 즐겁고 행복했지만 언제나 이런 상황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어두운 그림자가 현실의 바람이 되어 불어왔다. 그녀는 바람에 휘청거렸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캄캄했다. 느티나무 밑에 도착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와 처음 만나서 친구 하기로 한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달이 밝은 날이었고, 다짜고짜 친구를 하자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었다. 친구 하자며 내민 손을 덥석 잡았을 때 요동치던 심장 박동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의 뜬금없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했다. 힘든 현실에서 한 줄기 빛 같은 희망을 갖고 싶었던 마음속 깊은 간절함이 그녀의 손을 내밀게 했었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실제로 자신에게 많은 힘든 일들을 묻어 줬다. 이제 그녀와 악수하고 뒤돌아가던 그의 모습 뒤로 환했던 달빛들이 어둠으로 변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보니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빼곡했다. 어둠이 별을 더 빛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들은 은하수 띠를 이루고 강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은 그녀를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천체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내려 어둠에 싸인 길을 보니 잠시 어지러웠다. 잠깐 높은 곳을 올려다봤다고 금방 이렇게 어지럽다니. 그녀가 어지럽다고 해서 꿈쩍할 우주가 아니었다. 하늘은 더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으로 인해 고인 눈물로 별은 더욱 영롱하게 빛날 뿐이었다.

‘일 년이라도 참 행복해서 다행이었지. 고맙다.’ 그녀는 별들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힘들 때 가끔 이렇게 희망이 도망가지 않도록 빛을 주렴. 나 더 씩씩하게 살아갈 거야. 별님아 그동안 고마웠어.’

그녀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더 슬플까 봐 배에 힘을 꽉 주며 억지로 참았다.

그녀는 느티나무 밑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그동안 너무 행복해서 기도하지 않았어요.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요. 내게 다시 행복이 찾아올까 두렵지만, 용기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매일매일 내 힘으로 다른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나무 밑 짙은 어둠에서 걸어 나오니 어둠이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었다. 나무가 그녀에게 힘을 주는 듯했다. 고요한 공간 저 멀리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고, 자신의 학교 성적도 시나브로 떨어지고 있었기에 정리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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