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못 알아봐서 고마운, 첫사랑 3

by 벽우 김영래

일이 끝날 시간이 가까워 왔을 때 갑자기 밖이 소란하더니 초원의 들소 떼처럼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몰려 들어왔다. 학교 앞 학원이 끝나는 시간이긴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진열대를 누비며 컵라면과 물, 우유, 간식 등 서너 가지씩 가슴에 품고 계산대로 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물건값을 계산하느라 바코드 찍는 소리와 줄 서서 기다리며 장난치고, 떠드는 아이들 소리에 주인아저씨가 내실에 있다가 뭔 일인가 하고 나왔다.

“얘가 우리 학교 학생이라서 여기서 매일 간식을 살 거예요.” 누군가 뒤에서 큰 소리로 얘기했고, 한바탕 웃음소리가 퍼졌다. 아저씨는 밝은 얼굴로 고맙다며 그녀 옆으로 와서 계산하기 좋게 물건들을 정리해서 나눠 놓았다. 정신없이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나가고 다시 가게 안이 썰렁해졌다. 시간을 보니 버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주인은 그녀에게 빨리 가라며 호의를 베풀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앞치마를 벗어 놓고 가게를 나왔다. 정거장까지 5분 정도 거리였지만 벌써 8시 55분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있어 뒤를 돌아봤다. 뜻 밖에도 그가 있었다. 복장이 아니라 단정해서 다른 사람 같았다. 그녀를 보자 살짝 미소까지 지었다.

“아까 빌렸던 천 원 갚으려고 기다렸어. 자 받아.” 하면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괜찮아. 됐어.” 하면서 손사래를 치며 계속 걷는데 앞을 막으며 다시 천 원을 받으라고 흔들면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받을게. 이제 됐지. 나 지금 버스 시간이 급해서...” 하고 그가 내미는 천 원을 받아 손에 쥐고 한 걸음 비켜 옆을 지나 버스 정류장 쪽으로 뛰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가 계속 따라오는 것이었다.

“아깐 고마웠어. 돈이 있는 줄 알았는데 비상금 써 버린 걸 깜빡했어. 그리고 내가 친구들 너네 편의점으로 다 보냈지.” 묻지도 않은 얘기 하면서 그녀 옆으로 바짝 따라오며 계속 말을 걸었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가 막 와서 멈추고 있었다. 하마터면 차를 놓칠 뻔했다. 순간 등줄기에 땀이 났다. 몇몇 낯익은 아랫동네 애들이 먼저 버스에 올랐다.

그녀는 뒤에서 엉거주춤 서있는 그에게 “고마워.”하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버스에 올랐다. 그녀가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 운전석 뒷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녀 앞에 그가 서 있는 것이었다. 설마 그가 버스를 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빈자리가 있었지만 그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 옆에 서서 있었다.

“네가 왜 버스를 타니? 이 버스가 어디로 가는 줄 알아?” 하며 걱정스럽고 의아하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밑에서 보는 그의 모습은 아까와 달리 키도 더 크고 멋있었다.

“몰라. 그냥 탔어.”

“이거 시골 가는 버스야. 어떻게 하려고...” 혼잣말처럼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가방을 받아 달라고 했다. 어둠 커튼이 쳐진 창에는 차 안의 풍경이 그대로 복사되어 보였다. 뒤에 앉은 얘들이 잠시 수군대는 소리도 들렸지만 다시 자신들끼리 낄낄대며 늘 하던 쓸데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그가 몹시 걱정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차가 시외를 벗어나자 불안감이 더 무겁게 몰려왔지만 창에 비친 그의 모습은 오히려 당당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이십여 분을 달려 그녀가 내릴 준비를 하며 가방을 가져가라고 그를 올려 다 보았다.

느티골 정류장에 두 사람을 내려놓고 버스는 휑하니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신경이 쓰였지만 모른 체하며 길을 건너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는 2km 정도 걸어 들어가야 했지만 혼자 걷는 길은 늘 무서웠다. 하지만 오늘은 무섭다는 생각보다 뒤 따라오는 그가 신경 쓰였다. 그냥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걷고 싶었는데 신경은 뒤에 가 있었다. 편의점까지 가는 길의 그 가벼웠던 발걸음과는 정반대로 무겁고 복잡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도 이성에 대한 감정이 새싹처럼 푸른 싹을 틔워 낼 나이이긴 했지만 주변의 여건이 허락하질 않아서 그냥 모른 채 묻어두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남들 보기에 모든 부분이 평온하고 평평하게 보였을 뿐, 그녀도 언제 어느 곳이 부풀어 오를지 모르는 봄 숲 같았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달이 비추는 희미한 길을 걸었다. 동네 어귀 큰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처음 시골로 내려왔을 때 이곳이 제일 정겨웠고, 제일 무서웠다. 어른 두 아람도 넘는 우람한 나무가 새파란 하늘과 어울려 멋진 풍경을 만들어 주었지만, 어둠 속에선 귀신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아 발걸음이 빨라지고 뒷머리가 주볏주볏 서고 땀도 날만큼 무서웠다. 비 오는 날이나 캄캄한 밤이면 나무가 베어졌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었다. 오늘은 뒤에 오는 그가 신경 쓰여 무서운 생각도 다 잊었다. 나무에 가까이 왔을 때 더는 가만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인기척이 바로 뒤에서 났다. 그녀는 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도 멈췄다.

“어쩌려고 자꾸 따라오니? 너 집엔 어떻게 가려고...” 그녀의 무서움을 감추기 위해 음성을 낮고 차분히 했다. 한 팔 간격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기에 서로의 숨소리도 다 들렸다. 유리에 얇은 김이 서린 듯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치고 냇가엔 달맞이꽃들이 줄지어 빛바랜 노랑을 풍기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좋아.”

“뭐... 뭐라고?” 그가 한 말을 들었지만 엉겁결에 되물었다.

“네가 그냥 좋아. 사귀고 싶어. 친구해 줄래?”

그녀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짧은 시간 궁리를 해도 어떻게 답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 그냥 네가 좋았어. 다른 얘들처럼 놀지도 않고, 돈 버느라 일하는데 공부도 잘하잖아. 그래서 궁금해서 네 친구 서희한테 물어봤다. 너 어떤 애냐고. 그랬더니 다 얘기해주더라. 그래서 사실은 오늘도 너한테 가려고 일부러 그랬어. 기분 나쁘다면 미안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단 생각을 어슴푸레 처음 했다.

“그래. 이제 알았으면 돌아가.”그녀는 반대로 얘기했다.

“너 몰래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닌 거 미안하지만. 네가 좋아서 그랬어.”

좋다는 말에 그녀는 자꾸 흔들렸다. 반대로 아까처럼 몸이 가볍고 경쾌해지는 듯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달빛은 느티나무 아래만 파고들지 못해서 곰처럼 둥그렇게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무척 진지해 보였다. 결코 이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 당당했다. 그녀는 다행이라 여겼다. 그가 용기를 내서 다시 말을 건넸다.

“우리 친구 하자. 나 너랑 친구 하고 싶어.”

그녀는 그의 말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나도 너를 몇 번 봤어... 네가 왜 나랑 친구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난 매일 바빠.” 그는 그녀가 말을 쉬는 틈을 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네 친구가 돼주고 싶어서 그래. ” 그는 그녀가 말한 것에 힘을 얻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확신이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의 자신감이 좋아졌다. 지금 당장 친구가 된 것도 아니고, 친구가 되자고 한 말 한마디가 이렇게 맘 편하고 든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누군가와 가슴 뛰는 대화를 한 마디라도 한 것이 무척 기뻤다. 누군가와 시비가 붙으면 그녀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생기는 게 아닌가. 절벽에 매달려도 잡을 버틸 커다란 기둥 하나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저 달빛도 없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친구..... 좋아. 친구 하자.” 누군가 따뜻한 말을 걸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친구를 하자니 더 바랄게 없이 좋았다. 몇 년 사이 그녀의 삶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주눅 든 일상이었다. 그녀는 이제 됐으니까 막차 가기 전에 빨리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가 악수를 청해 왔다. 그의 감정이 그녀에게로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를 그에게 들킬까 염려되어 숨기려고 애썼지만 의지와는 상관없는 몸은 사랑의 반응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그도 그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 친구다. 낼 보자.” 하고 그는 가방을 멘 뒷모습을 보이며 몇 걸음 가다가 다시 한번 뒤돌아 손을 흔들며 뿌연 달빛 속으로 사라졌다. 희뿌연 달빛 속에서도 그의 모습은 밝고 환했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돌아가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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