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없겠지.
지구가 있었더라도 우리가 없겠지. 달이나 수성, 금성 같은 우주의 행성처럼 휑하겠지.
모래사막 위로 삭막하고 바싹한 바람만 깃발처럼 외롭게 나부끼겠지.
급히 가는 출장길에 고속도로를 달리다 문득 생각했다. 미끄럽고 시야도 흐릿해 '비가 왜 오는 거야!' 불평을 하던 중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다 급반전이 일어났다. 아니지 비가 없으면 나도 없었을 거잖아. 갑작스러운 사고의 전환 때문에 나 스스로도 적잖이 놀랐다.
그때부터 비의 필수 불가결하고, 유익하고 은혜로운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아프리카의 갈라진 대지 혹은 사하라 사막의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덮고 생명을 키워 낼 수 있는 건 오직 비뿐이잖아. 비가 없다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엉망이 될 것이다.
오아시스를 만들고, 꽃과 온갖 생명들을 키워내 결국 봄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모든 것들의 출발점이 바로 비다. 이런 은혜로운 베풂을 망각하고 고작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위에서 조금 미끄럽고 불편하다고 불평을 했다니. 나의 이기적이고 짧은 식견을 반성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비에 관한 좋은 추억들도 있었다. 어릴 적엔 비가 오면 밖에서 뛰어놀지 못해 싫었는데 딱 한 가지 좋았던 적도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이랑 긴 밭에서 기다리던 농사일이 비로 인해 다음날로 미뤄지는 호강을 누릴 때였다. 물론 그때는 손 하나가 아쉬웠을 부모님의 마음까지 읽지는 못했다.
또 지금은 불을 끄는 직업을 갖고 있는지라 하늘에서 스프링클러가 터져주는 날엔 제법 안심이 되니 작은 보너스쯤 받는 셈이다. 몇 해 전 봄. 주중엔 꿋꿋하다 주말만 되면 신나게 내리는 비로 산불 걱정 없이 보냈던 때도 있었다. 그땐 주말이 정말 편안했었다.
수많은 영화 속 우연의 장면을 연출하는 낭만적 사랑으로, 때론 가혹하게 쏟아붓는 재난의 주인공으로, 비범하면서도 평범하고, 한편 신비로운 이름의 비.
세월의 힘인지 나이 먹어감에 촉촉하게 젖는 비 오는 날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행여라도 우산 없다고, 어깨 옷 젖는다고, 길 미끄럽다고, 이런 어이없는 불평은 하지 말아야지.
오늘 밤도 자연의 순환 모터가 작동하며 창 밖에 빗소리가 요란하다. 낼 아침까지 온단다. 봄밤의 빗소리에 귀 기울이다 스르르 잠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