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선수는 긴장을 한다. 아무리 훈련을 많이 했더라도 소용없다. 0.001초라도 더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을 아는 내 몸이 알아서 반사적으로 작동을 하니 그럴 수밖에. 얼마나 긴장하고, 또 간절하면 그럴까. 쇼트트랙 경기에서 가끔 부정출발로 실격을 하는 선수를 본다. 수많은 시간 땀 흘리며 노력한 수고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제목을 불면으로 달아 놓고 엉뚱하게 '달리기'나 '긴장'을 얘기하는 건 뭐지?
달리기의 정반대 상황을 얘기하려고 한다. 띄엄띄엄 봐서 앞 뒤 스토리가 연결되지 않는 드라마를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보고 있으면 졸음이 쏟아진다. 목적 없는 눈동자와 잠들기에 최적화된 포즈는 꿀잠의 2대 요소다. 촌각이어도 좋고, 꾸벅꾸벅 졸아도 초콜릿 같이 달콤하다.
그런데 찬물을 뒤집어 씌우는 듯한 느낌의 인기척은 잠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곤 한다. 옆구리를 찌르며 방에 들어가라고 권하는 친절은 자칫 분노를 유발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깼으니 걷기도 힘든 몽롱한 걸음으로 방으로 향한다. 본격적인 수면을 위한 첫행보다.
양치 안 했지?
옷도 좀 벗고, 편하게 자야지!
몸을 움직이는 현상은 잠의 영혼을 내보내는 어리석은 짓임을 누구든 경험해 보았으리라. 잘 준비를 하는 순간 세상에 있던 모든 잠들이 내 곁을 떠나가는 재앙을 만나게 된다.
이도우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소설에서도 '첫잠에서 깨어 한바탕 밤이슬을 맞으며 돌아다닌 탓인지 좀처럼 두 번째 잠이 오지 않았다'라고 했다.
세상에서 준비와 긴장이 제일 필요할 때가 달리기 직전이라면, 무장해제 수준의 가장 루즈하고 가장 준비가 필요치 않을 때가 잠들기 직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자야지 하고 맘먹는 순간 잠은 떠나간다.
잠드는 습관도 가지가지다. 어떤 이는 TV를 켜 놔야 하고, 술을 꼭 마셔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음악을 들으면서 잠드는 사람도 있고, 옆에서 떠드는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잠드는 습관도 예사롭지는 않다. 암막 같은 커튼을 치고도 안대를 해야 잠이 온다. 눈이 안정감을 가져야 불안감이 해소된다. 그래서 여행이나 워크숍 갈 때 안대를 챙겨간다. 혹시라도 안대를 안 가져갔다면 그날은 백만 스물둘, 백만 스물셋... 하며 가늠하기 힘든 숫자의 훌라후프에 빠지거나 철조망을 넘는 양들의 환영에 시달리며 홀라당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불면 1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둘,
백만 스물 세에엣...
움켜줜 주먹 사이로 모래 빠지 듯,
힘을 줄 수록 빠지는 잠
잠이 오지 않는 동안
새벽이 오고 있었다.
예전에 할머니가 야속하게도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무래도 불면을 물려받았나 보다. 서른 초반 사무실 당직할 땐 당직관은 잠이 안 온다고 TV 켜 놓고 부스럭거리는데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 기대 먼저 잠들 때도 있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낮잠을 자지 않으려 노력하고 커피도 줄였다. 애써 잠들려고 하지 않으니 오히려 잠을 잘 자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아내가 코를 너무 골아서 자기가 잠을 설쳤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며 발뺌을 하면서도 기분이 좋다. 내가 그렇게 잘 잤나 하며 녹음을 해보라 하기도 했다.
불면 2.
손톱 달이 뿌옇게 닳도록
잡념에 애를 끓였다
잠이 오지 않아
잠들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의식하지 않고, 집착하지 말아야 비로소 해결되는 게 불면이 아닌가 싶다. 어디 세상에 이런 게 불면뿐이겠는가. 자신의 길에서 묵묵히 걷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얻게 되는 것들이 또 있겠지. 어느새 괴로운 불면에서 조차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되는 나이가 되어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