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영화 애호가의 왜 좋냐면⌟ 레오 까락스와 아름답게 오해하는 법
드니 라방의 신체성은 언어로 포착하지 못할법한 어떤 상태를 보여준다. 그의 괴상한 걸음, 예외성이 돌출하는 몸짓, 경련하듯 튀는 팔다리는 일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에너지를 재현한다. 까락스는 드니 라방의 몸을 통해 비로소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거나, 그가 언어로 포획하는데 실패를 경험했던 수많은 것들이 드니 라방의 몸을 통과하여 처음으로 형태를 얻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의 번역이다. 까락스의 내면 세계가 드니 라방의 신체 언어로 번역되는 것. 그리고 어쩌면 그 번역은 원본보다 더 풍부할 수도 있다. 드니 라방은 단순히 까락스의 의도를 재현하는 도구적 매개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직관으로 해석하고 변형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까락스와 드니 라방의 관계는 일반적인 관념의 감독-배우 관계보다는 공생에 가깝게 보인다. 까락스는 드니 라방 없이 자신의 비전과 언어 이전의 언어를 완전하게 실현할 수 없다. 그가 포착하려는 이미지, 재현하려는 리듬, 전달하려는 감정은 드니 라방의 몸을 통과해 완전해진다. 아마도 다른 배우로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 감정은 나의 것이 아니라 감독의 것이다. 드니 라방 역시 까락스의 영화 안에서 자신의 신체성이 가진 가능성은 최대한으로 해석되고 평가된다. 그의 해석이 신탁이고 표현이 증명이며 까락스는 그것을 포착하고, 기다리고, 기록한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위하는 공생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다. 까락스와 드니 라방은 정말로 서로를 이해하는가. 까락스는 드니 라방의 몸짓에서 자신의 표현하지 못한 내면을 읽어내고 있다고 느낀다. 드니 라방은 까락스의 의도를 해석해서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느낀다. 인간이 신을 얼마나 오독할지 알 수 없듯이, 두 사람이 서로의 기대와 언어 이전의 언어를 실제로 이해했는지 신만이 알 일이다. 그러나 그 무력하고도 간절한 오해가 진공에 묵음의 고함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각각이 고유한 개별의 우주인 개인이, 고독을 견디는 위로이자 기만이다.
이 서글프고 신성한 오해는 비단 까락스와 드니 라방에게만 해당되지 않으며 모든 예술적 소통의 본질이다. 작가는 독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독자는 작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화가와 관객, 음악가와 청중, 감독과 배우, 연애와 우정, 혈연과 자기 자신까지. 모든 관계에서 확증 가능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이 예술을 묵음의 고함 너머로 확장하는 가능성이다. 까락스가 드니 라방에게서 포착한 것이 드니 라방이 이해했다고 믿는 감독의 의도인지 알 방법이 없는 이 고독한 세계에서, 그 단절된 우주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둘 중 누구도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었던 제 3의 우주다.
단절된 고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소리가 닿지 않는 고함이 서로에게 닿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완벽한 이해나 소통은 불가능한 우주에서, 그 간절한 오해가 만들어내는 의미가 태어난다. 이것은 위로이자 기만이다.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서글픔을 알고도 소리를 내고, 춤을 추고, 영화를 찍는다. 완벽한 소통을 체념하는 대신, 그 불완전한 소통 속에서 기적처럼 의미 있는 위안이 탄생하기를 바라면서.
까락스와 드니 라방의 공생적 관계는 이 구슬픈 이야기를 아름답게 증언한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오해와 해석의 이격에서 만들어지는 창조적 긴장 관계. 이것이 일상 언어에 저항하는 예술의 본질적 한계이자 그토록 인간답고 구슬프게 아름다운 고유 영토로 남을 수 있는 비밀일지 모른다.
결국 이것은 까락스와 드니 라방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독한 개개의 우주들이 서로에게 손을 뻗는 모든 순간의 이야기다. 우리 모든 개개인은 서로 단절된 우주로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사과에 대하여 서로 다른 색을 보며 '사과가 붉다'고 대화할 뿐이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 앞에서 고립되어 좌절하지 않는다. 여전히 말을 걸고, 글을 쓰고, 몸짓한다. 그 신성하고 애달픈 오해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고독을 견디며 서로에게 기적의 가능성으로 현현한다. 린치가 보여준 것처럼 완벽한 이해는 환상일지도 모를 일이나, 그러나 까락스가 보여주듯 그 환상을 향한 몸부림이 인간다움의 서글프고 애틋한 예술성이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우리는 계속 영화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