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감동과 추억이 존재하듯 내게도 그런 대상들이 분명 존재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즐겨 읽던 동화책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내겐 변함없는 감동과 추억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우연한 계기로 한 동화작가님으로부터 중학생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손에서 글을 하루도 놓아본 적이 없는 듯하다. 결국 글이란 내 인생을 담아주는 유일한 수단이란 생각이 든다. 반면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은 동화들은 굉장히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200번 이상 읽은 동화책은 세드릭 이야기가 유일하다.
세드릭 이야기는 굉장히 단순한 책인 듯 하지만 그 속에서는 크고 작게 느낄 수 있는 여운의 요소들이 굉장히 많이 함축되어 있다. 줄거리는 대충 이러한데 책의 주인공인 세드릭은 아주 똑똑하면서 용감하기까지 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예쁨의 대상이 되곤 했다. 또한 영국 대위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 형제들도 세상을 떠나게 되니 백작 할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마저 없어 세드릭이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본래 미국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라났던 세드릭이기에 영국에 들어감과 동시에 무수한 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이 융화되고 조화로움을 찾아가는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과정 중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긍정적으로 변화되기에 굉장한 청량감과 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별 특별한 일이 없는 세드릭 이야기지만 그토록 많이 읽었던 이유는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채 모험을 하는 듯한 생동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에 이런 책들은 접하면 접할수록 감성이 풍부해졌고 일상 속 유일한 즐거움의 원동력이 되어주곤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좋아했던 동화를 외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책 한 권 읽는 여유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설령 동화 한 권 읽는 시간도 채 나지 않았지만 이제까지 글 쓰는 습이 배어있었기에 꾸준히 똥 싸듯 글 쓰는 일은 지속해왔으며 나 또한 서른을 바라보게 되니 그 아름다운 동화이야기를 나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훗날의 아이들을 위해 소소히 꺼내보아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진정 내게 있어 동화란 순수와 정화 그리고 초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듯 동화가 지닌 특유의 순수성으로 정화가 이뤄지고 초심마저 다시 일깨워지듯 그 어떤 누군가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동화 한 권만으로 벅찬 감동과 재미 그리고 마음의 정화가 함께 이루어졌으면 한다. 사실 작가라는 거대하고 큰 타이틀은 그저 옷에 불과할 뿐 아니던가. 그만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아니어도 가끔은 삶의 운율을 읊조리는 가수가 되기도 하고 삶의 밑바탕에 색을 불어넣는 화가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누구나 현실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옷을 입고는 살아가지만 찬 바람 부는 겨울엔 코트를 걸치고 수줍은 봄바람 일렁이는 날엔 가벼운 카디건 한 장 걸침으로써 조화로운 인생에 순응할 줄 아는 위대한 존재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굳이 액세서리가 필요 없는 글에 군더더기가 붙여지면 본연의 순수성을 잃어간다. 물론 그러한 순수함을 잃을 수밖에 없는 요인들로는 많은 것들이 존재할 테지만 적어도 동화에는 더하기보단 빼기가 익숙해져야 한다. 즉 있는 그대로의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더 이상의 깔끔한 글이 나올 수 없게 되듯 어른의 복잡한 번뇌들을 빼는 과정이 중요한 듯하다. 그렇게 나는 마치 빼는 연습이라도 하듯 어느 순간부터 똥 싸듯이 후련하게 글을 써 내려간다. 열심히 쓴 글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정직함이 글에 베일 땐 나도 모르는 시원함이 느껴지고 청량감마저 더해지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서른을 바라보며 완전한 비움보다는 적당히 빼낸 동화 글을 써내려 한다. 아마 그 어떤 누군가에게는 시련이 시작이 될 수도 있었고 아픔 뒤에 새로운 만남으로써 시작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처음이란 것이 존재한다. 반복되는 시련 앞에도 처음이 있었고 새로운 만남 전에는 분명 누군가와의 아픈 첫 만남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시도할 때 그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굉장히 배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초심이란 결국 새로운 인연과 옛 인연들에 대한 예의이며 겸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 나는 그 시작에 첫 발을 내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