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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Dec 17. 2018

나의 사춘기에게.

모두가 힘들던 그때.

문득 그럴때가 있다. 다른 이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아닌 스스로에게 실망하여 스트레스를 받는 날. 크게 무언가 잘못된 것도 아닌데 내가 한심하고 답답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질때. 마음이 중압감에 눌려서 몸까지 무거워지는 그런 날이 종종 있다. 그 무게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까 한숨을 끊임없이 내쉬어보지만 바람을 타고 다시 돌아오는지 조금도 편해지지 않는다. 그러고는 스마트폰 메신져 속 대화방들을 훑어보고 다시 한숨과 함께 주머니로 넣는다.


귀에 꽂아진 이어폰에서 볼빨간사춘기의 '나의 사춘기에게' 노래가 흘러 나온다. 기쁠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때는 가사가 들린다는 소리가 문득 생각난다. 아무 생각없이 틀어놓은 노래의 가삿말이 가슴에 박혀들어오는게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오늘은 이걸로 글을 써야겠다. 


이렇게라도 일어서 보려고 하면 내가 날 찾아줄까봐             -볼빨간 사춘기, 나의 사춘기에게 中




초등학교때 부모님의 이혼을 받아들여야 할 때, 아버지의 빚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 할 뻔 했을때, 할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에게 눈물을 보이며 호통을 쳤을때. 그리고 그걸 문 하나 사이로 모두 들었을 때. 바람잘날 없는 가정사 덕분에 많이 아프고 마음으로 운 적이 많았다. 어린나이에 그 일들을 겪으며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다른게 아니였다. 내가 이렇게 아프다는 것을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나에게 자세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고 나를 상황에서 멀게 두려고만 했다. 주위 친구들에게는 그 나이에 창피한 것을 알았는지 나의 아버지가 빚으로 우리집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더욱이 친구의 행복한 가정사를 들을 때면 내 가슴은 바늘로 찌르듯 아파왔고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집의 상황들은 그 바늘의 갯수를 늘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 나이 스무살. 결국 모인 바늘들은 가슴을 뚫어버렸다.


대학을 갈 때 나는 한부모가정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입학 등록금을 내면 학기도중에 다시 등록금을 돌려주는 혜택이었는데 당시 난 넣어둘 등록금이 없었기에 이혼한 어머니에게서 등록금을 빌렸었다. 그런데 이때 돈을 돌려받는 통장이 사정상 아버지 통장으로 밖에 할 수 없었다. 예전에 내 통장에서 돈을 꺼내갔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말했었다. 

"아버지 이거 내 돈 아니고 어머니 돈이에요. 이건 정말 1원도 손대시면 안돼요!"

당연히 아버지는 알겠다고 답했고 나는 큰 걱정없이 학교생활을 했다. 학기도중 등록금이 계좌로 이체됬다는 메세지가 날라온 당일, 나는 저녁 바로 어머니에게 돈을 드리기 위해 인터넷 은행 사이트를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봐도 내 등록금의 절반만 통장에 잔여금으로 남아 있었다. 금액을 확인하자마자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정말 혹시나, 설마 하며 거래내역조회를 들어가자 현금인출기에 돈을 꺼낸 기록이 찍혀있었다.


그대로 사고와 행동이 모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백만원이 넘는 금액이기에 당시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돈 때이지 말라고 한 기억까지 겹쳐지면서 정말 말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드디어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몇 번의 다이얼이 울리고 들리는 아버지의 평소와도 같은 목소리. 그저 조용하게 물었다. "아버지 혹시 그 돈 쓰셨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어 아빠가 급하게 써야할 돈이 있어서."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마자 나의 폭탄은 터져버렸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냐고, 내 돈도 아니고 아버지돈도 아닌 돈을 아버지가 급하다고 쓰는게 맞냐며 몇 십분동안 아버지에게 욕을 하고 화를 냈다. 아버지는 그저 미안하다고 하며 들어주었으나 화는 전혀 풀리질 않았으며 너무 화가나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똑같은 욕과 화를 반복하는 나를 그제야 발견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을 들고 있었던 오른쪽 팔이 저리며 잘 움직이지 않아 당황했고 내 몸까지 이렇게 만든 아버지에게 다시 화가나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 전화를 끊으며 나는 약 1년 동안 내 스스로 아버지를 내 인생에서 지웠다.


내 짧은 인생에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심장이 세차게 뛰는게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는 것으로 삭힌 적이 많아 이번에도 억지로 누워봤으나 저 쿵쾅대는 소리가 도저히 잠에 들지 못하게 했다. 다시 나는 핸드폰을 들어 동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왜.'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랑 술좀 마셔줘라." 앞에 서두도 없이 그냥 말을 띄웠고 잠시 적막이 이어지더니 친구가 먼저 말했다. 

"무슨 일 있냐?"

"아니. 별 일은 없는데 그냥 술좀 마시고 싶어서."

벌써 1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친구였지만 내가 이렇게 아파서 술로 달래려 한다는 것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 끝에 평소처럼 작게 웃었다.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게임하느라 바쁘다, 나가기 귀찮다 하며 거절할 놈이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별 일 있어보이네. 같이 마셔줄 수는 있는데 그럴때 술마시는거 아니다."

다시 울음이 터질 뻔 했다. 그 짧은 한 마디에서 이 친구가 나의 아픔을 알아주고 있었다는게 절절하게 느껴졌다. 항상 난 아플때 혼자였고 나의 아픔을 말하지 않는 이상 다른 이들이 몰라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남들에게 위로받고 싶지 않기에 더욱 나를 혼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저 한 마디가 그 생각을 모조리 부수고 들어왔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러냐. 그래 고맙다."

친구는 내일 다시 전화하라고 툭 말을 던지고 무심하게 전화를 끊었다.  심장박동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1분 남짓한 그 짧은 통화 한 번에 활활타던 마음이 따뜻함으로 바뀐 덕분에 전화를 끊고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잠에 들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아버지와 화해도 했으며 더 이상 압박감속에서 혼자 있으려 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고 외로운 사춘기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이 힘든 사춘기를 보내기에 이 글을 적고 싶었다. 이제는 그때 내 친구처럼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만약 이전의 나처럼 아직 슬픔을 혼자 삭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대로 삭히되 하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유치한 말이지만 반드시 알아줬으면 좋겠다.


당신은 절대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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