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하다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출발 한 지 고작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 내 예측을 몇 번째 확인하는지 모르겠다. 기내로 들어온 후에도 비행기는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어떤 사정인지 비행기는 기내에 모든 손님이 앉았음에도 약 30분 이상동안 출발하지 않았다. 나야 내 액운을 안타깝게도 잘 아는지라 첫날 일정을 비워두다 싶었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이 당연히 더 많았다. 그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지쳐서 사라질 때쯤에야 비행기는 출발했다. 아마 저 사람들에게는 30분이 30분 같지 않았을 것 같다.
기다리던 몸이 의자에 붙는 느낌을 받는다. 비행기가 뜨기 시작한다고 알리는 듯한 이 기분은 바이킹을 타고 떨어지거나 롤러코스터를 타고 떨어지는 기분과 비슷하다. 기대감을 갖고 날아오르는 것과 기대를 즐기며 내려가는 것을 비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비행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기대를 즐기며 떨어지기를 더 자주 하니까.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편안해지기 시작한 것 같아 폰을 꺼내 들었다. 비행기를 타는 여행의 큰 준비물 중 하나는 '기내에서 뭐 볼까?'라는 궁금증의 답안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익숙한 애니메이션부터 드라마, 영화 등 여러 답변이 보였다. 나의 답은 일본 드라마였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드라마였는데, 일본에서 나름 국민 드라마 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드라마였다. 이전부터 보고 싶은 드라마였으나 유산소 운동 시간에는 '슬기로운 ##생활'시리즈에 밀리고 집에서는 영화에 밀린 , 나에게는 일종의 비운의 선택지였다. 곧 있으면 일본어가 주변에서 들릴 텐데 미리 귀에게 어색함을 풀어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지금은 귀 풀어주기지만 돌아올 때 보게 되면 느낌이 또 다를 것 같기도 하네.'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이번 여행의 귀국 비행기는 씁쓸함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것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런 기대를 담아 스크린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5시가 되었고 비행기의 바퀴는 땅에 덜컹하고 닿았다.
간사이 국제공항. 공항 자체는 이전에 친구와 둘이서 와본 적이 있었다. 그땐 오사카를 여행하기 위해 들렸었는데 이때 경험이 이번 여행의 목적지를 교토로 정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 사천왕사(시텐노지라고 불린다)라는 절에서 본 불상과 건축물들의 분위기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런 것들에 감흥을 느끼는 나에게 한 친구가 교토를 권했다. 그런 것들은 교토가 제일이라는 말이 꽤나 오래 기억 속에 남아준 덕분에 꽤나 부푼 기대감으로 나는 교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교적 익숙하게 입국 수속을 마치고 교토를 가는 신칸센. 하루카를 타기 위해 간사이 국제공항 전철역으로 가는 문으로 나섰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감탄했다.
'와... 예상은 했지만 진짜 뒤지게 덥고 습하다.'
여름 일본의 날씨는 보통 한국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여름에 일본은 나가지를 못한다느니, 나가면 손해라서 숙소에만 있게 됐다니 별소리가 다 있다. 나는 그런 소리들을 꽤나 담담히 무시하며 이 공항에 왔었다. 본인은 육군 현역으로 전역했는데 당시 복무지가 대구였다. 한국 국민이 더운 도시 하면 떠오르는 그 대구 말이다. 그러다 보니 더위에 대한 내성이 꽤 높은 편이라고 자신했으나 그런 자신감은 초장부터 박살이 났다. 거짓말 없이 딱 1분만 밖에 있어도 몸에서 땀이 적극적으로 나오려 하는 게 느껴졌다. 거기에 습함까지 더해지니 이건 완전한 기분 분쇄기였다. 순간적으로 멍 해지는 기분을 느끼다가 번뜩 생각이 들었다.
'아! 하루카 선 이거 시간당 두 대 밖에 없는데. 지금 몇 시지? 교통용 카드도 만들어야 하는데!'
더위가 내 계획을 뺐어가려 했으나 애써 붙잡는 데 성공했다. 메일로 왔던 하루카 선 QR을 열어두고 역무원으로 보이는 분에게 하루카 선 발권기를 물었다. 역무원은 나를 발권기 앞까지 데려가서 5시 반 하루카 선의 티켓을 뽑아줬다. 묻기만 해도 발권까지 웃으며 해준다니 역시 친절함의 관광지.라는 기분이 들었다.
아, 참고로 내 일본어는 굉장히 애매한 레벨이다. 히라가나는 읽지만 가타카나는 읽지 못하고, 위와 같은 간단한 회화는 또 그럭저럭 한다. 말하기는 좀 달리지만 듣고 해석하는 것은 적당히 하는 그런 정도다. 초등학교 때 코난을 일어버전으로 매일 챙겨봤는데 아마 그 덕분에 지금 이런 상태인 것 같다.
어찌 됐든 발권한 표로 하루카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이전에는 여기 역에서 표도 읽어버리고 헤매기까지 했었는데, 그때 경험 덕분에 길을 꽤 알게 되어서 이번에는 자신감 있게 길을 찾으며 이동할 수 있었다.
신칸센을 타는 곳으로 이동하니 하루카 선이 출발 전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전철에 그려진 헬로키티. 여행 출발 전 계획을 세우면서 하루카 선에는 키티가 그려져 있다는 것을 봤었다. 사실 키티를 좋아하지도 않고 심지어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 괜히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상상에 가까워지는 건 늘 이런 느낌을 준다.
내 표는 자유석에 앉을 수 있는 표였다. 아직 신칸센이 청소 중인지라 들어갈 수 없었기에 자유석칸 중 사람이 비교적 없는 곳에 줄을 서기 위해 이동했다. 이동하며 한국어가 꽤나 많이 들렸다. 이때부터 느낀 것 같다. 혼자 여행하면 귀가 꽤나 밝아진다. 에어팟을 끼지 않으면 귀가 혼자 한국어를 수집해 뇌에 때려 박는다. 줄을 선 곳에는 군대 전역 후에 온 남자분들이 계셨고, 이런 쓸데없는 고성능 귀 덕분에 나는 그분들이 오사카 역에서 내릴 때까지 그분들의 여행 계획이 머리에 박혔다. 원치 않는 음흉함에 약간의 죄악감이 들어 그분들이 내릴 때 기도도 드렸다. '첫 해외여행 재밌게 즐기고 안전하게 돌아가세요.'
어찌 됐든 신칸센. 하루카선은 출발했고 나는 종점역 교토까지 멍하니 창문만 봤다. 계속 들리던 한국어가 안 들리니 그제야 더 집중해서 창밖이 보였다. 하늘은 구름이 층져있고 어느새 해는 넘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예매한 표가 5시 반 차였으니까 그럴만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사각형 창문 밖의 모습은 내가 여행을 온 이유 중 하나였다. 다르게 생긴 모습을 보고 싶었고 다른 언어를 듣고 싶었다. 일본 여행을 가본 분들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본은 집이 대부분 낮고 정겹게 생겼다. 우중충해 보일만한 건물도 그 동네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살짝 다른 모습이 여행의 체감을 올려준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한다면 이렇게 창문 밖을 오래 보기를 권하고 싶다. 같은 감정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문득 치매가 있으신 할머니를 데리고 KTX를 탔을 때가 생각나서 울적해지기도 했었다. 그때 우리 할머니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 보였던 건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 때문이었나 보다.
하루카 선의 자유석 같은 경우는 승무원이 돌아다니며 표체크를 하는데,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승무원께서 내 표를 검사하고 가셨다. 놀랍던 건 전철 한 칸에 들어올 때 한 번, 나갈 때 뒤돌아서 한 번 약 85도 정도로 승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어디서나 저런 프로 정신을 보면 가슴이 따뜻하다 못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느낌을 즐기며 조금 시간을 보내자 7시. 교토에 도착했다.
하루가 선의 종점답게 헬로키티가 교토에 온 것을 환영하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기둥 쪽으로 캐리어를 붙이고 그 위에 걸터앉아 숙소로 가는 길을 찾았다. 주변에 풍경이 일본 스럽게 변해서 그런 걸까. 이제부터는 오랫동안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런 걸까.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인 느낌을 받았다.
구글 맵은 가라스마 선을 타고 이동하라고 알려줬다. 일본 여행할 때 구글맵으로 전철을 탄다면 반드시 색상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 전철은 한국과 비슷하지 않아 같은 역으로 보여도 다른 선일 수 있기 때문에 구글이 알려준 가라스마 선의 녹색을 기억하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안내판에서 분명히 가라스마 선이라고 써져 있는 길을 따라 이동해 왔는데, 마주한 갈림길의 안내판에는 어느새 가라스마 선이 보이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길치 끼가 꽤 있는 나에게는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구글 맵은 나는 타는 역을 찍어줬으니 역할은 다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크린에 비치고 있었고, 주변에 물어볼만한 역무원은 보이질 않았다.
'그래. 일단 일정 없으니까 여유롭게 찾자.'
편히 마음을 먹고 다시 안내판을 보자 '지하철'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본의 지하철은 한국에 비하면 꽤나 복잡해서 잘 보고 가야 하기에 불신이 먼저 들었지만 일단은 해당 안내판을 따라갔다. 지난 여행에서 지하철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따라갔지만 막상 그 지하철이 아닌 경우를 겪었던 상태였다. 자기변호를 하자면 불신이 꽤나 깊은 상태였다.
계속 따라가다 보니 전철 역 다운 공간이 나왔다. 다만 지하철을 대표하는 색이 구글맵에서 알려주는 내가 타야 할 선로의 색과 달랐다. 그래도 역시 지하철 역. 두리번거리다 보니 인포메이션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마음속으로 해야 할 일본어를 되새긴 후 안에 있는 역무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여기 가라스마선은 어디로 가면 되나요?"
"오른쪽을 개찰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개찰구가 있었다. 내가 확인한 곳에서 조금만 더 둘러보면 녹색의 안내판과 개찰구가 보였는데... 바로 앞까지 가서 길을 물어보다니!
"감사합니다!" 굉장히 부끄러워져 빠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미리 교통카드를 만들어두기를 잘했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그 자리는 빨리 피하고 싶었다. 후다닥 계단을 내려오고 괜히 멋쩍어서 전철이 오는 곳에 계신 역무원에게 가는 역의 방향을 물었다. 플랫폼 벽 쪽에 가타카나로 이전역, 다음역이 써져 있어 읽지 못해 물었는데 역무원의 손짓을 따라 다시 안내판을 보니 그 아래에 역 이름이 옅게 영어로 써져 있었다. 더 부끄러워져 버렸다.
'연속으로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물어봤네. 이거 완전 어글리 코리안이잖아.'
물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쪽팔림이 만드는 순간적인 바보 경험. 이것을 제대로 겪은 순간이었다.
슬쩍 길을 알려준 역무원에게서 멀어져서 전철을 기다렸다. 전철은 금방 도착했다.
'전철이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다. 절대 저 역무원한테 쪽팔린 거 때문이 아니야. 지금 시간이 벌써 7시 반이라고.'
정말이었다. 비행기가 연착될 때까지만 해도 7시에는 호텔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8시가 넘어서 겨우 들어갈 것 같았다. 체크인을 늦게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교토의 저녁시간 문화가 제일 걱정거리였다.
교토는 우스갯소리로 10시만 넘으면 갈 곳이 없다는 소리가 있었다. 농담인 줄 알았지만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더 그랬다. 내 계획은 일단 체크인을 하고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나가는 것이었다. 교토에 적응하지 못한 내 몸은 푹 젖어서 '이 상태로는 절대 저녁식사를 즐기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호텔 도착하면 대충 8시... 근처 번화가에 아무리 못해도 8시 반에는 도착해야 해 대충 알아본 곳 근처로 가서 가게 찾아보기도 해야 하니까.'
미리 찾아본 몇 곳의 위치와 호텔 위치를 비교해 보면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보고 시간을 계산하길 반복했다. 딴생각이 많아지면 시간이 빨리 간다. 에어팟을 가방에 넣어둔 상태여서 다행히 난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릴 수 있었다. 멍하니 있다가 역 이름이 들리다니. 천운이었다.
최대한 서둘러 호텔까지 캐리어를 끌고 이동했다. 호텔까지 걸어서 10분이라고 구글 맵에 나와있는 것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 나를 죽이고 싶었다. 교토의 10분은 저녁에도 쉽지 않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경고하고 싶다. 이 경고를 가볍게 본다면 언젠가 분명 10분 뒤 말라가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정말 명심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잔뜩 마른 상태로 호텔에 도착했다. 셀프 체크인이라서 걱정하며 들어왔는데 다행히 직원이 계셨다.
"체크인하겠습니다."
"네. 여권 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또 어눌한 일본어로 여권을 내밀었다. 직원분이 보시더니 유창하게 한국어로 체크인을 도와주시기 시작하길래 "혹시 한국인이세요?"하고 여쭤보니 유학 중이라고 하신다. 진심으로 "대단하시네요..."하고 마음이 새어 나왔다. 유학 중이면 나랑 비슷한 또래 거나 더 어릴 텐데, 외국에서 혼자를 버텨내고 있다는 것은 경탄의 대상이 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글리 코리안은 다른 대단한 코리안덕에 호텔에 편하게 입성할 수 있었다.
쉴 시간은 없었다. 이제 여행의 첫 계획을 시작하러 갈 때였고 나는 하루가 끝날 시간에 제일 두근대고 있었다.
잔잔한 두근거림. 설렘이 있던 1일 차 점심내용입니다. 다음 글은 1일 차 저녁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