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알람이 울렸다. 설레는 마음에 잠을 좀 설친 나는 암막 커튼 사이로 드리우는 푸른빛을 받으며 간신히 눈을 떴다. '드디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짐은 전날 밤 체크리스트를 되짚어가며 싸둔 터라 씻고 나서 챙길 것들을 제외하면 더 챙길 건 없었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이 전날 밤 설렘덕에 일어나질 못했다. 거의 감에 의지하듯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나온 후, 준비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이사한 새 집은 문을 나오면 뒷산이 보이는 아파트 단지다.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뒷산의 풍경은 이곳으로의 이사를 후회하지 않게 하는 큰 이유다. 오늘도 그 이유를 기대했으나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주 적은 양이 내리고 있기는 했지만 비가 내리는 여행의 첫날은 맛이 좋지 않은 법이다.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비를 부르고 다니는 타입의 사람답게 익숙한 손짓으로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썼다. '이 정도는 예상했어. 좋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네이버 지도 어플을 켰다. 전날 밤 찾아보니 여기서 대중교통으로는 뭘 어떻게 하든 근처 역으로 가 공항버스를 타야 했다. 처음에는 비싸서 전철을 타는 루트를 찾아봤지만 뱅뱅 돌아가는 지도의 동선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나를 위한 포상 같은 여행인데 이건 아니지.' 나는 지도 어플에 목적지를 야탑역으로 적었다. 가장 가까운 공항버스는 그곳에서 탈 수 있어서 전날 자리를 예매했었다.
'어디 보자. 이 버스가 제일 빨리 가겠네. 예상 도착 시간이... 어?'
어플에서 알려주는 야탑역 도착 시간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늦었다. 이 시간에 도착한다면 예매한 버스는 진즉에 떠날 시간이었다. '택시, 택시라도 타자. 아 돈 엄청 쓰겠네. 여행 시작부터 이게 뭔...'
속된 말로 기분이 엿같았지만 기다렸던 여행을 시작부터 초치고 싶지 않았다. 안 좋은 생각은 좀 버리고 택시를 불러 탔다.
"여행가시나 봐요?"
택시 트렁크에 캐리어를 올리고 타자마자 기사님이 말을 걸어왔다. 마치 예상한 것 같이 익숙한 기사와 승객의 대화가 이어졌다. "네." , "어디로 가세요." , "일본이요." , "누구랑?" , "혼자가요." , "대단하네." 그따위의 것들 말이다. 누군가는 이런 참견을 주책이라며 싫어하지만 나는 솔직히 즐기는 편이기에 그리 싫지 않은 시간이었다. 야탑역에 도착하려면 한 오 분은 더 가야 할 것 같은 위치에서 기사님이 웃으면서 요금 정산기를 끊었다.
"자, 7700원에서 금액은 끊겠습니다. 하하하" (정말 하하하 하고 웃으셨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세상에는 이렇게 만화처럼 웃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전의 스몰토킹이 이런 것을 노리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왜요? 저 괜찮아요."
"제가 7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거든요! 가끔 손님분들이 7천 원쯤 나오겠다 싶거나 7700원쯤 나올 것 같으면 미리 끊어드립니다. 취업해서 혼자 여행 가신다는데 이 정도 축하는 해드려야죠. 하하"
말을 하시면서 다시 액셀을 밟으시는 모습은 마치 소설 속 인물처럼 낭만스러웠다. 비를 지우고 있는 와이퍼의 소리까지 더해져서일까, 정말 그래 보였다.
"감사합니다.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더 할 말이 없었다. 비 때문에 맛이 없는 하루를 시작하나 했는데, 몇 년에 한 번 남을 하루가 시작됐다.
감사한 택시에서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공항버스에 몸과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처음 타는 공항버스였는데 과연 비쌀만했다. 한 시간을 넘게 타면서도 그리 불편한 지를 몰랐다. 제일 중요한 건, 과연 공항행. 타는 사람들은 다 예쁘고 멋졌다. 대부분은 커플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솔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알겠지만, 괜히 커플들이 많으면 주눅이 든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믿는다. 진심으로.
그렇게 좀 기죽은 채로 공항에 도착했다. 비는 그쳐있었다. 탑승권을 발권하고 시간이 꽤 남았길래 미리 면세 구역으로 들어가 밥을 먹으려고 했다. 때마침 울리는 카톡 소리.
'이럴 줄 알았다. 좋은 일 있은지 얼마나 됐다고. 에휴.'
11시부터 한 시 반까지도 충분히 길게 남았었는데, 한 시간이 더 추가됐다. 공항에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면세 구역에서 살 건 크게 많지 않다. 더군다나 출국하는 날이라면 더더욱. 결국 입에 넣을 것들을 좀 깨작거리다가 사람 구경, 공항 바깥 쳐다보기 밖에 남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을 족히 세 시간은 해야 된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에게 친구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DM이나 카톡으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최대한 지루함을 달랬다.
연착 때문에 여행 계획이 어그러질 걱정? 그런 것은 없었다. 나는 나의 여행운을 누구보다 잘 알고 믿고 있다. 어디를 가든 비가 오고, 어디를 가도 계획대로 되는 적이 없다. 혼자 여행을 처음 가는 나는 그 사실에 입각해 여행 첫날은 단 두 개의 계획밖에 세우지 않았었다.
'호텔 가기. 그리고 반드시 이자카야나 타치노미 가서 저녁에 한잔 하기! 이거면 충분한 계획!'
연착이 아무리 많이 돼도 교토에 7시에는 도착할 것이었다. 나는 걱정 없이 풍경을 즐기며 쉴 수 있었다.
대충 공항의 탁 트인 풍경을 보면서 멍을 때리니 어느새 탑승 수속 시간이 다가왔다. 잠깐 버려뒀던 정신을 부여잡고 여권과 모바일 항공권을 들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고작 비행기를 세 번째 타는 거였지만 비행기 안으로 이어지는 연결부는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선들로 유리창 사이를 갈라놓은 디자인은 나를 내가 모르는 다른 공간으로 이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옛날 디지몬이나 만화에서 본 이 세계로 가는 포탈도 이렇게 선들로 표현됐었는데, 마치 그 포탈의 내부 같은 느낌을 받는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 내 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드디어 한국에서 내 몸이 할 일을 끝낸 기쁨에 힘이 쭉 빠졌다. '이제 시작인데 뭐 이렇게 힘드냐.' 설렘이 증폭되지만 몸은 거부하는 느낌. 묘한 기분을 느끼며 드디어 내 몸은 한국을 떠났다.
여행을 시작한 첫 날을 모두 쓰고 싶었지만, 삶이 바빠 나누어 적으려 합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