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시작
다음 날 6시. 익숙한 아이폰의 알림을 들으며 눈을 떴다.
'지금 가도 안 늦겠지. 뭐...'
교토의 아침은 특별하다고 한다. 아침의 교토와 그 이외의 시간의 교토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점은 관광지에서 더욱 유별나다고 강조를 들었기에 나는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젯밤, 오늘의 아침을 시작할 곳을 고민했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관광지는 기요미즈데라(청수사)와 후시미 이나리 신사(여우신사) 였는데 둘 다 각각의 방향으로 유명한 관광지였다.
'청수사는 아래 산넨자카, 니넨자카 거리도 보기 좋다던데... 그럼 거기서 기념품이나 과자 같은 것도 좀 사야겠다. 아침에는 여우신사 가서 리이 구경이나 하자. 그리고 여우신사 밤에 가면 멧돼지 나온다던데 이게 맞는 것 같다.'
사실 마지막 생각이 컸다. 이틀차 밤에 여우 신사를 갈까도 생각해서 '밤 이나리 신사'를 구글에 검색해보기도 했었는데, 입장이 된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커뮤니티에 밤에 이나리 신사에 올랐다가 멧돼지를 만났다는 글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은 싹 달아났다. 인증샷이 있는 게 호러 포인트였다. '그 상황에 사진 찍을 생각을 하냐. 진짜 한국인들 인증샷 욕심은... 에휴...'
어찌 됐든 나는 빠르게 씻고 짐을 챙겼다. 어제 들어오는 길에 산 물. 그리고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양산과 손풍기를 챙겨 넣고 6시 30분이 되기 전, 일찍부터 나와있는 호텔 스태프 분들의 일본어 배웅을 받으며 나는 호텔을 나섰다.
'와. 장난 없네.'
문을 나서자마자 마치 옛날에 본 '블리치'의 장면처럼 몸이 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만화에서는 '영압'이라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마치 그것에 의한 작용처럼 몸이 습도와 태양빛에 눌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정도는 예상했었지만 문제는 아직 오전 6시 반이었다는 것이다. 한창 해가 짱짱할 두 시쯤에 내 여행 일정이 있다는 게 정말 사무치게 아쉬웠다. 다행인 것은 지금 가는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지하철 역이 가까웠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제 이동했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0분 정도를 걸어 역에 가까워지자 시원해 보이는 강이 보였다. 듣기로는 이 강이 교토를 가로질러 오사카까지 흘러간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만한 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크게 뻗어진 강 양 옆으로는 으레 그렇듯 산책로가 길게 뻗어져 있었고 이곳은 동네 주민들이 구성의 일부가 되어 풍경을 채우고 있었다. 어딜 가든 강가 옆 산책로에는 동네 주민들이 강아지와 산책하거나 노부부가 함께 걷고 있다. 이것만은 해외를 가도 국내여도 참 올곧게 일정하다.
멈춰 서서 강의 사진 한 장을 찍고 조금 더 이동. 기요미즈 고조 역에 도착해 전철을 기다렸다. 이 역은 하나의 선만 통과하는 비교적 작은 역이었기에 어제 교토역과 같은 사건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전철을 타고 후시미 이나리 신사 역에 도착하자마자 여우 조각상들이 반기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역에 장식이 되어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명동에는 되어 있으려나.'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그런 게 되어있으면 좀 더 외국인들이 길을 잘 찾겠지.
여우의 콧대를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철도 건널목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철도 건널목이 없다 시 피하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없애는 방향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에서 워낙 매력적인 장치로 철도 건널목을 봐서일까. 그 '땡 땡 땡 땡'소리와 내려오는 차단기. 잠시 후 커다란 소리와 함께 슈룩슈룩 지나가는 전철이 합쳐진 이 모든 것은 알게 모르게 뭉클한 느낌을 준다. 그것을 잠시 구경하고 앞으로 나아가니 드디어 신사의 입구를 알리는 문. 토리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 오사카에 갔을 때는 절이나 신사의 입장 문화에 잘 몰라서 첫 토리이를 그냥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나름 공부를 하고 교토에 왔다. 무릇 로마에 갔으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는데 전에 나는 무정부주의자처럼 다닌 것이라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토리이에 인사 한 번하고 옆길로 걷기였지?'
둘 다 신사에서 모시는 신에 대한 매너 같은 것이었다. 토리이의 중앙은 신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긴다고 하는데 이전 오사카에서 나는 본의 아니게 신이 됐었던 것이었다. 다시 한번 내적 쪽팔림을 경험하고 신사의 본당을 향해 걸어갔다.
본당으로 오르는 길 또한 어제의 야사카 신사처럼 낮고 긴 모습의 계단이 나열되어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흰색 작업복을 입은 분들이 본당의 테이블이나 신사 기물들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넓고 유명한 곳이라 그런가 많은 인원들이 아침부터 관리를 하고 있었다. 조금 신기했던 모습은 본당 건물 내부로 들어간 이들은 청소 입장 시 안에 모시는 신들의 석상이나 목상에 인사를 하고 들어가고 나올 때도 인사를 하고 나오는 모습이었다. 첫날 신칸센에서 손님들을 향해 인사하는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직원 분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분의 모습은 '진정한 서비스 정신'이 외적으로 표현된 것 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안내판을 따라 계속 걸어 올라가다 보니 드디어 후시미 이나리 신사의 특징인 붉은 토리이로 되어있는 길들이 보였다. 앞에 관광객들이 조금 있기는 했으나 감상에 방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산의 정상까지 이어진 신사인데, 이 토리이로 이어진 길이 약 50분을 조금 넘게 이어진다고 알고 있었다. 산의 정상까지 오를 생각은 없었어서 일단 체력적으로 되는 곳까지만 걸어 올라가 보자고 생각하고 걷기 시작했다. 습도는 더 올랐지만 산의 빽빽한 나무들과 토리이가 그늘을 만들어서 그렇게 큰 더위가 느껴지지 않기도 했고(물론 높은 습도 덕에 땀은 두배로 났다) 어느 정도는 할만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앞에 뭐 사고 났나? 왜 저리 사람들이 몰려 있어?'
옹기종기 모여있는 머리들이 보였다. 가끔 산악로에서 뻗어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에 뭔 일이 났나 싶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교토 하면 떠오르는 유명장소다 보니 이 신사에는 명확한 사진 스팟이 몇 개가 있었다. 내가 마주한 것은 그것들 중 하나였었다. 이 머리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 명이 삼각대를 들고 와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아마 걷는 모습을 담기 위해 찍고 있는 것 같았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이런 영상을 찍을 때는 걷는 길에 사람이 없을수록 몽환적으로 보인다. 이 착하고 순한 사람들은 그걸 위해 길도 못 지나가며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내가 멈춰 선 지 얼마 안 돼서 동영상은 만족스럽게 찍혔던 것 같다. 삼각대를 치우자 그제야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이런 일을 몇 번 정도 겪을 정도로 오래 걸어 올라가자 이제 내 주변에는 계속 보이던 몇 명의 관광객만 보였다.
신사나 절에 들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우리나라의 절을 생각하면 향 냄새가 바로 떠오르듯, 일본도 신사 특유의 냄새가 있다. 이나리 신사도 야사카 신사도 신사에서 그런 향이 느껴졌었다. 신기한 것은 분명 산으로 들어가고 있는데도 그 향이 코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짙어져 갔다. 마치 이 산 전체가 신사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맡아볼 수 없었던 향과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토리이(문). 이것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정말 다른 세계로 이어진 길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토리이 사진과 영상을 찍으면서 올라가다가 문득 '내 모습도 한 장 찍어야 하나?' 싶어서 주변을 돌아봤다. 보이는 건 다행히 서양 노 부부 한 쌍 밖에 없었다. 조금 용기를 내서 부부에게 내 모습을 찍어줄 수 있냐고 부탁하자 남편분께서 흔쾌히 사진을 몇 장 찍어주셨다.
한국인들은 사진에 대한 애착이 커서 그런가 '서양인은 사진을 대충 찍는다.'라는 편견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전 오사카 신세카이에 갔을 때, 내가 친구랑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한국인 찾고 있었다고, 사진 찍어달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나도 그런 편견이 조금은 있는 사람이었으나 걱정이 무색하게 사진은 너무 잘 찍어주셨다. 문제는 피사체였다.
'어제 라면을 왜 처먹고 자서... 아니야, 그게 문제는 아니라는 건 알아...'
"땡큐!"
마음과 다른 표정으로 노부부에게 감사를 전한 후 슬픔을 쓰게 삭히며 신사를 올라갔다. 20분을 조금 더 넘게 올라왔다고 생각하자 이젠 정말 주변에 사람이 안보였다. 토리이는 끝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아래 사진 스팟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하긴 나 같아도 이렇게 길 거라고는 생각 못 한다.'
아직 체력은 꽤 남아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 쉼터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 대충 꽂혀있는 표지판에 일어가 적혀있었다. 일본어를 몰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앞으로 30분은 더 걸어야 1차 완봉 지점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표지판을 보자마자 남아있던 체력이 소진되는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쭉 빠지는, 마치 게임 속에서 간당간당하게 hp를 남기는 공격을 맞은 듯한 기분. '이걸 더 올라가 말아' 하는 상황에서 새까만 고양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등장한 애들이 멍하니 나를 보고 있길래 몇 번 만져주니 스윽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긴 녀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또 다른 고양이들이 보였다.
'여기가 후시미 네코 신사인가?'
홀린 듯 또 그 고양이를 따라가니 또 다른 점박이 고양이가 보였고 정신 차리니 어느새 내려가는 길이었다. 고양이들 때문에 마음이 솔직해져 버리다니. 반성할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풀밭의 고양이, 신사 구조물 안에 고양이, 석상 옆 고양이 따위들에게 유도되며 신사의 산에서 내려왔다. 나는 일본의 신사에 오면 꼭 오미쿠지(신점 뽑기)를 하려고 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도 신사에 왔으니 당연히 신점을 뽑기 위해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안 사실. 아직 너무 시간이 일렀다. 일반적으로 신사는 9시쯤부터 그런 상품들을 판매하는데 지금 시간은 7시 45분. 상품을 구매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휴게실에 앉아 잠시 고민했다. 슬슬 배가 고프기도 하고 산을 타서 그런가 한시라도 빨리 호텔로 복귀하고 싶었다. 그렇게 몸의 욕심과 정신이 욕심이 고민하던 도중 어떤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덥지?"
목에 건 하얀 수건으로 땀을 훔치시며 말을 거시는데 일본 드라마 장면 같았다. '사실 일본 드라마는 굉장히 현실적이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네. 진짜 엄청 덥네요."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더위는 힘들단 말이야... 여행 왔어?"
"네. 여행입니다."
"일본인?"
아, 발음이 이상한 게 티가 났나 보다. "아니요. 한국인이에요." 대답을 하며 살짝 눈치를 봤다. '이상한 할아버지일 수도 있어.'
어제 새벽에 물을 사러 잠깐 편의점에 갔다 왔는데, 그때 웬 노숙자가 붙어서 돈 달라고 한 기억이 스쳐갔다. 어쩔 수 없는 자기 방어기제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야, 대단하네. 혼자서 온 거야? 교토까지?"
잠깐 나온 의심이 무색할 만큼 할아버지는 감탄하며 물어왔다. 순간적으로 눈을 정말 동그랗게 뜨셨는데, 만약 이 표정이 연기라면 교토의 내숭은 정말 유명할만했고, 지금 이건 일본 드라마가 맞다고 생각해야 했다.
"네. 이전에 오사카에 갔을 때 사천왕사를 봤는데, 너무 좋아서요. 역시 이런 건 교토지! 싶어서 교토에 왔어요."
"맞지. 잘 찾아왔네!"
할아버지 덕분에 꽤 괜찮은 시간을 보냈다. 잠깐의 더위를 식힌 것에 만족하셨는지 그분께서는 이따 신사 아침 행사 같은 것이 있으니 그걸 보며 기다리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순식간에 다가오시더니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 모습이 오히려 내 이번 여행을 여행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본당 쪽으로 이동하자 이미 행사는 진행 중이었다. 매일 하는 아침 예배 같은 것이었던 것 같은데 모시는 신상에 아침 상을 대령하고, 자신의 예를 바치는 모습이 정갈히 아름다웠다. 옆에서는 그 행사를 보며 일본인들 몇몇이 와서 동전을 던지고 신사의 예에 맞게 합장을 하기도 했다. '그래. 이게 신사다운 모습이지.' 싶은 아주 클래식스러운 풍경. 의문의 할아버지 덕분에 그 속에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또 보낸 후 나는 휴게실로 대피했다. 선풍기가 있는 자리 앞에서 잠시 멍하니 있자 창문 밖에서 누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오미쿠지. 열렸어!"
그 할아버지였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는데, 고개를 들 때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짜 바람 같으시네.'
어찌 됐든 목표는 오미쿠지였다. 앞에는 이미 5명 정도가 줄을 서고 있었지만 기다린다는 표현이 아까울 정도로 짧게 기다리자, 내 차례가 왔다.
적은 돈을 내고 오미쿠지 통을 열심히 흔들었다. 오미쿠지는 뽑기 형식이 여러 개가 있다. 여기의 방식은 큰 통에 숫자가 적힌 나무 스틱들을 넣어놓고 이를 흔들면 작은 틈으로 나무스틱 끄트머리가 나온다. 이때 나온 스틱의 숫자를 보고 직원이 신점이 적힌 종이를 주는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나를 뽑고 다시 휴게실로 복귀. 종이를 파파고 어플을 통해 해석하려 했으나 이런 문서의 특성상 고어나 어려운 한자가 많아 파파고가 잘 해석하지 못한다. 고작 해석한 것은 '말대길'이라는 큰 글자 정도였다.
대충 좋은 거겠거니 하고 돌아가려 하는데 또다시 바람처럼 할아버지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오미쿠지는 했어?" 아마 나를 기다리고 계셨나 싶을 정도였다. 과분한 관심에 홀린 듯이 접었던 종이를 다시 펴고 보여드렸다. 그러자 나오는 일본식 리액션.
"말대길! 오오~이건 훌륭하네!"
뒤에 대길이 붙긴 했으니 좋겠지. 하고 예측만 했는데 정말 좋은 걸 뽑았던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말로는 이건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있으면 은메달정도로 대길 바로 뒤라고 한다. 정말 년 말에 대길이라는 뜻이라고.
기뻐하는 웃음을 살짝 보이자 할아버지는 또다시 바람처럼 사라지셨다. "그럼, 앞으로도 여행 건강하게 해!"라는 말을 남기시고 말이다.
2일 차 아침을 굉장히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 기분을 들고 천천히 신사를 빠져나와 호텔로 돌아갔다. 물론 나갈 때도 토리이에 인사를 빼먹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