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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 Jul 09. 2019

그 아이는 누가 위로해주나?

복직의 무게

지난주 금요일, 교감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선생님, 9월 1일 자로 복직하실 거죠? 복직원을 쓰시러 학교로 한 번 오세요.”

그래서 월요일에 학교로 가게 되었다. 가족관계 증명서를 제출하고 복직원을 쓰는데 걸린 시간은 3분도 채 되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께서 교장 선생님을 뵙고 가시라고 하셨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교장실로 들어가니 교장 선생님 특유의 콧소리를 섞어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따뜻한 차도 마시며 육아휴직에 대한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교감선생님께서 넌지시 요즘 학교 상황이 좋지 않음을 한탄하시기 시작했다. 기간제 선생님께서 담임을 맡고 계셨는데 8월까지만 하고 그만두시겠다고 한다. 기간제를 9월부터 구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셨다.      


원래 나는 과학 전담교사로 가게 되어있었다. 담임이 중간에 바뀌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으니 9월 1일 자로 출산휴가를 들어가는 선생님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한다. 교감 선생님이 말한 그 반은 2월에 반을 정할 때도 선생님들 사이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매년 학교폭력과 관련된 아이가 있던 그 반. 올 해도 어김없이 그 아이와 관련한 학교폭력대책위원회는 두 번이나 열렸고 담임은 정신적 충격으로 병가를 내서 기간제 교사로 바뀐 상태였다. 기간제 선생님께서는 면접에서 자기는 더 심한 아이를 맡아보았다며 잘 지도해보겠다며 내년까지 계약한 상태였지만 8월까지만 하고 싶다고 하셨다.      

육아휴직을 하기 전 “9월에 복직하게 되면 그 반 담임을 맡게 될 수도 있다고 육아휴직을 하지 마라”던 동료 교사의 말이 6개월이 지나 나에게 돌아왔다. 사실 육아휴직을 안 했더라면 나는 그 아이의 반을 맡았을 것이다. 나는 훌륭한 교사는 아니지만 ‘교사로서 문제 학생을 피하면 그 학생은 누가 가르쳐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생각해보면 교사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했고 오만함이기도 했다. 한 번은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아이를 “제가 맡아 잘 지도해보겠습니다.” 했는데 그 아이는 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고 전학을 간 일도 있었다. 동료 선생님은 마음을 좋게 써서 그렇다고 하고 지나갔지만 그 해 아이들과 너무 행복하게 지내면서도 한 편으로는 누군가는 준비되지 못한 마음으로 그 아이를 받아 힘드셨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교장실의 공기가 순간 서늘해졌다. 무언가 나에게 달린 듯한 간절함의 무게가 느껴졌다.

“제가 할게요.”

그 말을 한 순간 교장 선생님은 한 층 밝아진 표정으로 내 두 손을 움켜잡으며 콧소리를 섞어 “선생님을 안아주고 싶은데 그러면 안 겠지?” 하셨고 나는 어색한 눈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아이를 책임지고 제대로 가르쳐서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나머지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을 위로하고 다독여주세요.”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듣고 교장실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아 교장선생님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어 왜 그럴까 생각했다.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참 외롭겠다.’     


심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교폭력 사안은 아이들의 문제를 어른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그 아이가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아이는 지금 자신의 문제를 올바로 돌아볼 시간보다 어른들의 감정과 자존심 싸움에 지쳐있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학폭의 결론이 무관용 원칙에 기반을 둔 인과응보식의 징계로 이뤄지는 것을 보면 그 내면이 어떨지는 짐작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과정이 어른들에 의해 설명되고 결정되는 구조에서 아이들은 상처 받고 이제 그만 상처 받고 싶어 감정을 닫아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조차 읽을 수 없는 괴물이 되어 가지는 않을까? 아이는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타버려 호랑이가 가는 데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학교에 오면 아무도 자기와 놀아주지 않으려 하고 선생님에게조차 경계의 눈초리로 감시받는 듯한 갑갑함과 지독한 외로움을 그 아이는 어떻게 견뎌야 하나.


학교라는 공간에서부터 문제아란 이름표를 새겨주고 이미 배제시켜 자신의 실수를 돌아볼 시간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다면 그 아이가 성장해 살아갈 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이 각박한 사회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까?  

그 아이는 누가 위로해줘야 할까?  어쩌면 그 아이의 부모와 함께 우리도 그 아이를 괴물로 기르고 있는 건지 모른다.  


다시 교실에 서는 그 순간까지 많은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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