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학교에서 돌아온 예담이가 밖에 나갔다가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울 땐 무슨 일인지 궁금해도 “울지 말고 말해봐”라며 다그치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많이 속상한 일이 있었구나. 다 울고 나서 기분이 좀 풀리면 아빠한테 얘기해줘”
못다 한 빨래를 널며 예담이 울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다 울고 나서 예담이가 말했다.
자전거를 타고 슬러시를 사 먹고 오는 길에 모르는 형들이 예담이를 보고 “난 너보다 더 빨리 탈 수 있는데”라고 말했다. 형들이 무서워서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가는데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이제 밖에 무서워서 못 나가겠다고 하며 다시 그때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눈물을 쏟았다.
이럴 땐 무조건 아들 편을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말하는 상황이 상한 감정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들이 들은 그 말은 분명 잘못된 표현방식이었다.
“그 말을 듣고 진짜 속상했겠다. 듣는 아빠도 화가 나는데 예담이는 얼마나 무섭고 속상했을까.”
“아빠, 근데 싸가지가 뭐야?”
“싸가지는 음... 예의 같은 거야.”
“예의면 어른한테만 해야 하는 거 아냐? 그 형들은 어른도 아니잖아.”
“형들도 아이들이지만 너보다는 나이가 많으니까 어른은 어른이지.”
“그런데 형들은 왜 나한테 예의가 없다고 했을까?”
“내가 대답을 안 하고 그냥 지나가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근데 형답지 않게 말한 것 같아.”
“형 다운 게 뭔데?”
“아빤, 형 답다는 건 동생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거, 좋은 모습을 동생에게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 나이가 많다고 다 형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게 나쁜 말로 아들에게 상처를 준 아이들이 밉다가도 ‘그 아이들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상처 받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니 한 편으로는 어른으로서 미안해진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말을 그대로 다른 사람을 상처 주는 데 사용하는 방법밖에 알지 못한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예담이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난다.
그 형을 용서해주자고
그 형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상처 받은 것 같다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아쉽게도 그 상처 받은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위로받지 못했을 것 같다고
그 말이 엄청 아팠는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그 아픔을 느껴보게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렇게라도 자기가 정말 아팠다고 슬펐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용서는 결단코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상처를 준 친구를 불러 놓고 강압적으로 사과하라고 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용서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헤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부모는 내 아들의 상처만 보는 게 아니라 내 아이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있게 도움을 줘야 하지 않을까?
내 아이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위로받고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이 부모로서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