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 하곤 같이 놀지 마
사라진 공동체성을 바라며
어젠 예담이가 학교를 갔다 와서 말했다.
“아빠, 오늘은 나랑 야구 연습해요.”
“오늘은 딱지치기 안 해?”
“이번 주 일요일에 야구 시합 있잖아요.”
그렇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유소년 야구대회 첫 경기가 있다. 지난번 양구에서 열린 유소년 야구대회에서의 미안함을 만회하고자 머뭇거림 없이 그러자고 했다.
밖에서 캐치볼을 하고 라이브 배팅 연습을 하는데 같은 야구단에서 뛰고 있는 후배도 합류했다. 그리고 사회인 야구 4년 차 아빠의 전문적인 훈련 시스템을 가동했다. 펑고를 50개가량 하고 나니 점점 주변에서 구경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집에 글러브는 있지만 제대로 야구를 배워보지 못한 아이들이다. 바쁜 아빠를 둔 탓에 캐치볼을 많이 해보지 못해 예담이와 후배의 훈련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한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예담이와 같은 반이라는 그 아이.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예담이가 전해주는 교실에서 일어난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다. 선생님 앞에서 욕도 하고 친구들과 예담이를 자주 놀려 속상했다는….
어느 날은 예담이가 학교에 다녀와서는
“아빠, ○○가 자꾸 내 고추를 만져.”
“왜?”
“물어보면 지나가다 모르고 했다는데 그게 몇 번째야.”
“그 친구한테 분명히 기분 나쁘다고 얘기하고 한 번 더 그러면 선생님한테 말씀을 드리는 게 좋겠다.”
별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친구가 예담이랑 놀고 싶어 해서 별로 내키지 않는대도 가끔 노는 친구였다.
그 친구도 집에서 글러브를 가지고 왔는지 우리가 하는 야구 연습을 보고 있었다. 처음엔 끼워주기 싫은 마음이 있었다. 내 아들을 힘들게 한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예담이가 아빠랑 같이 있는 모습이 부러웠는지 애꿎은 벽에 공을 던지고 몸으로 받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졌다. 그래서 같이 야구 연습을 하자고 했다.
글러브는 있지만 연습을 해보지 않았는지 글러브로 공을 받는 기본자세부터 가르쳐주어야 했다.
“우선 공을 무서워하지 않아야 해.”
“전 공 안 무서워요. 형들이랑 맞짱도 많이 까 봤어요.”
“어... 그래.. 공을 끝까지 보고 위로 오면 이렇게, 가운데로 오면 이렇게, 그리고 밑으로 오면 이렇게. 자, 해보자”
정말 그 친구는 공을 별로 안 무서워했다. 운동신경이 좋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배우고 싶어 했고 곧 잘했다.
“우와, 잘하는데? 금방 늘겠다.”
칭찬에 급 화색이 돌아 열심히 하는 그 친구... 개구쟁이지만 아이는 아이였다.
그 친구와 함께 같이 야구를 하고 내일 또 야구하자는 약속을 하고 나서 8시가 넘어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 예담이에게 그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예담아, 오늘 학교 같이 가면 안 돼?”
예담이는 그러자고 하고 집을 나선다.
그 친구는 사실 외로웠던 건 아닐까? 외로워서 친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방법은 잘 모르겠고. 자기 생각대로 한 관계 맺기의 결과는 꾸중과 잔소리. 친구들은 자신을 멀리하고 점점 소외되는 감정이 들어 더 자극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고야 마는 악순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벌써 몇 번째 학교폭력 사안으로 관련된 아이라는 소문은 아이에겐 보이지 않는 낙인을 찍어버리지 않았을까?
“그 아이 하곤 같이 놀지 마.”
수많은 부모가 가장 소중한 내 자식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하는 그 말.
내 아이와는 엮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은 세련되게 다듬어진 폭력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아이는 대체 누구와 놀아야 하나? 그렇게 관계가 끊어지면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망망대해에서 조난 당해 무인도에 불시착한 아이들의 이야기다. 그 곳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서로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을 벌이던 아이들은 해군으로부터 구조되고 난 뒤 마치 꿈에서 깬 어린아이처럼 운다. 아이들은 극한의 상황에서는 인간으로서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잔인하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불안함을 견디기 힘들었던 가여운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10대 4명이 한 친구를 무자비하게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어제의 뉴스는 그들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는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자각이 없는 이상 내일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 시인의 시 <그 날>의 한 구절이 생각나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