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

아빠는 육아휴직 중

by gt


“아빠, 나 오늘 부회장 후보에 올랐어요.”

3학년이 된 첫째 아들이 집에 오며 한 첫마디였다.

그 순간,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고 갔다.

초등학교는 보통 3학년부터 학급 임원 선거를 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채 서둘러, 친구들을 제대로 사귀지도 못해 누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그 시점에 학급 임원을 선출한다.

사실 왜 그렇게 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없다.

항상 그렇듯이 사안에 대한 깊은 사유 없이 매년 해왔던 관행대로 일을 진행할 따름이다.

나는 관행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고위 공무원들의 잘못에 대한 해명하는 말

“그것은 당시 관행이었습니다.”

자신에 잘못에 대한 비겁한 변명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내 앞에 서서 빨리 아빠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아이를 앞에 두고 이런 생각들을 숨기듯 정리했다.

그리고 웃음기를 품고 아들을 축하했다.

며칠 전, 주간학습안내를 보고 3학년이 되자 아들에게 학급 임원을 해보고 싶냐고 물었었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는 첫째는 한 번 도전해보겠다고 얘기했었다.

부회장 후보가 되었다는 예담이에게 “왜 회장 후보로는 도전을 안 했어?”라고 물었다.

“회장 후보로 도전한 아이들은 9명이나 되었어요.”

“오늘은 후보를 뽑았다고?

아이의 말을 들으니 후보가 너무 많으면 표가 나눠져 학급 임원 후보를 수요일에 2명씩 정해서 최종 결선을 목요일에 한다는 의미였다.

결국 나름 머리를 굴려 당선 가능성을 보고 부회장에 도전했다는 아들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빠, 앞에 나가서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로 서서 자신 있게 자기의 공약을 얘기하면 돼.”

“공약?”

“공약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부회장이 되면 지킬 약속을 말하는 거야.”

“무슨 약속을 하지?”

“제가 부회장이 된다면 학급에서 정한 규칙을 잘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겠습니다.”

“그건 부회장이 아니어도 다 지켜야 하는 거잖아.”

“제가 부회장이 된다면 친구들보다 높은 사람이 아닌 조력자가 되어 학급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잠깐 참고하려고 봤던 유튜브에서 좋아 보이는 말을 따라한 것 같다.

“어떤 최선?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


아들아, 아이들 사이에도 정치는 있다.

하지만 선거철에만 반짝하는 정치꾼은 닮지 않길 바란다.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남발하고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꾼은 닮지 않길 바란다.

아이들 앞에서 네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길.

네가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길.


“네가 부회장이 되어서 진짜 할 수 있는, 해야 할 게 뭔지 생각해봐.”

“친구들끼리 싸울 때 말리는 거?”

“또?”

“교실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 줍는 거?”

“좋다. 아빠는 아이들이 수업시간 안 지키는 거 진짜 힘들더라.”

“그럼 쉬는 시간 끝나면 수업 시작한다고 얘기해주는 거.”

“그래, 좋아”

그렇게 정한 공약을 연습하고 나서 예담이에게 얘기했다.

“예담아, 부회장이 되면 네가 얘기한 거 꼭 지키려고 노력해야 해.”

“당연하지”


대학원에 다니느라 늦게 오는 엄마에겐 한 번도 연습하는 걸 못 보여주고

다음 날 학교에 갔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예담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담아, 어떻게 됐어?”

“흐 흑... ”

“예담아, 괜찮아.. 아쉽..”

“아빠, 나 부회장 붙었어.”

“아이씨, 놀랐잖아.”

“아빠 놀리려고 연기한 거야. 히히”

“예담아, 축하해”

“응”

“아빠, 오늘 당선된 다음에, 남아서 교실 청소하고 왔어.”

“이야, 우리 아들 잘했네.”

“근데 말이야. 오늘 급식 시간에 우리 반 여자 아이가 나한테 이렇게 얘기했어.”

“뭐라고 했는데?”

“난, 네가 말한 공약이 좋아서 너 찍은 거야. 꼭 지켜.”

“잘 모르는 여자 친구가 나한테 말을 한 게 처음이야.”

“이제 공약 잘 지켜야겠네.”

“응”

예담이도 힘주어 말했다.


이제 예담이는 말에도 무게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어릴 적 가벼운 말로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낸 후 한동안 침묵을 선택했지만 그마저도 외로워 그만두었다.

늘 그렇듯 내 자식은 그러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때로는 말의 가벼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가벼이 지나가버리기도, 쉽게 잊히기도 할 테지.

때로는 자신의 말이 누군가의 평생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줄 마음의 추가될 수도 있음을 알 때가 올 것을 믿는다.

훗날 말의 무게로 힘들어하며 아빠를 찾아왔을 때 마음을 잡아 줄 무게의 말을 준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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