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꺼운타인 Mar 30. 2020

아빠가 아파라고 들릴 때가 있다

눈물의 확장

  돌도 지나지 않는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야 한다. 내 아이라고 특별한 게 있겠어. 맞벌이 부부가 다 그런 거지. 아무리 담대하게 생각해봐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딸을  보면 억장부터 무너진다. 좀 더 가진 게 많은 아빠였다면 울릴 일이 있었을까. 적어도 혼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세상에 더없는 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빠, 아빠,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의 발음이 아파라고 들릴 때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아픈 건 나라고 믿을 때가 있었다. 나라는 주어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청춘이었고, 나라고 발음할수록 이룰 수 없는 문장으로 가득했다. 술집에서 술집으로, 상처에서 상처로 함부로 발자국을 옮겼던 날들이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어떠한 곁이 없어도 혼자라서 모든 게 다행이었다.

  어쩌자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 애를 낳았는지. 이 모든 신비를 설명할 문장은 없다. 아직도 미지의 시간을 건너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딸은 현실의 한복판으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벽을 짚고 걷던 손을 놓기도 하면서, 온몸으로 생명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마냥 만 보고 싶은데, 그게 다일 것도 같은데 어린이집 보내는 시간이 온다. 아침밥을 먹이고, 세수를 시키고, 기저귀를 갈고, 옷을 갈아입히고, 가방을 챙기고, 양말을 신겨야 한다. 제법 능숙해졌지만 몸놀림이 많아진 딸을 다루는 일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가장 어려운 일은 양말을 신을 때이다. 도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을 예감하는지, 온몸을 비틀며 울기 시작한다. 양말을 벗어던지며 아빠, 아빠를 찾는 딸이 마냥 아프다.

  아프다고 보채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양말을 신어야 한다. 정해지 시간에 딸은 맡겨지고, 내가 찾으러 갈 시간까지 발등이 퉁퉁 붓도록 견뎌야 한다. 신종 코로나가 거리마다 창궐해도, 어린이집에 대한 소문이 흉흉해도 견딜 수밖에 없다. 아이와 나, 거의 한 몸으로 아픈 시간을 무엇으로 불러야 하나. 고민도 하기 전에 이유식을 만들어야 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 글을 써야지 하는 순간 설거지가 쌓이고, 빨래를 널 시간이 온다. 몸이 힘든 건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데, 모두 그렇게 육아를 버티는지 알겠는데, TV에서 우는 애만 봐도 내가 먼저 주저앉고 싶다.

  혼자라서 다행이라고 믿을 때가 있었다. 내가 흘린 눈물에 익사를 해도 기꺼운 슬픔이 있었다. 아프다고 말할수록 멀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직장을 잃고, 사랑을 잃고 다칠 대로 다친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갈 때는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결국, 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사랑이 모호해질수록 나를 괴롭히며 끝까지 나에게로 향했다. 자신만 우는 울음은 가장 외로운 방식의 체벌, 그걸 청춘이라고도 했으며 타인에게 가지 못하는 지도를 짜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내가 쓴 눈물의 지도보다, 내 작은 딸의 눈물이 더 아프기 시작했다. 문득, 작은 눈물이 물꼬를 트는 세계를 더 믿기로 했다. 아직 내가 버리지 못한 세계도 있지만, 첫울음으로 맞닥뜨리는 자식의 세계가 있었다. 비로소 지켜주고 싶은 세계였으며, 진실로 타인에게 건너갈 수 있는 길이었다. 눈물의 확장이었으며, 눈물로 상처 많은 것들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일이었다.

 자식운다. 살아야겠다.
 운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울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