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다가 밤의 가장자리가 될 때 가만히 부르는 이름이 있지. 사랑으로만 부르고 싶은 이름이었는데.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캄캄한 현실속에서 빼앗겨 버린 이름이기도 하지. 근사한 사랑도, 눈이 먼 사랑도 아니지만 사랑으로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 이름, 그게 늘 가은이어서 밤의 한복판에서 어지러운 발자국이 붐비지.
발자국 수만큼 깊어지는 밤과 깊어질수록 아득한 별빛. 사랑이란 밤하늘을 키우는 일이거나, 눈빛부터 무거워지는 일이었나. 고개 숙인 가로등처럼, 뼈를 드러내는 별자리처럼 어떤 밤은 너에게 닿지 못할 발자국으로 가득했다.
가은아 기억하니. 임신 축하 파티 때 가은이란 이름은 딸이 지울 수 없는 이름이라고, 케익에 새겨넣었던 것. 언제나 넌 내 사랑의 중심이고, 내 심장의 중력이고 싶어 그렇게 적었는데. 설탕물처럼 번지는 현실이 어떠한 단맛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버렸지.
그냥 슬프거나 외롭거나 아프면 좋겠다. 그냥 삶이 주는 미각을 감정으로만 감각했으면 좋겠다. 자주 발음해서 무디어지는 것은 혀가 아니라 현실, 어두울수록 또박또박 걸어오는 것은 내일이어서 마음으로 갈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지긋지긋한 대출금과 삶을 연명하게하는 독촉들. 다시 독촉들....... 하나하나 갚아가는 일이 상처를 부르일과 같아서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멀어지기도 했다. 상처 받을 줄 알면서도 상처를 호명하는 일이 생을 지켜내는 일인 줄 알았다.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 상처의 시작인지도 모르고.
사랑한다는 말이 상처가 될 때에도 나는 너를 부르고 있었다.
너를 호명하는 일이 가장 아픈 방식의 체벌이었지만. 이 생에 내가 가장 아프게 부를 수 있는 이름도 너였다. 그건 죄일지도 모르지만.
그 죄가 깊어 어느덧 백일이 되고, 천일이 되고 비로소 오늘이 되었다. 남들처럼은 못해도, 남이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주고 싶었는데. 남도 나도 되지 못하고 어둠만이 우리 사이를 오가게 되었구나. 사랑한다는 말의 방식이 바뀌고, 말의 빛깔이 바뀌어도 오롯하게 지켜낼 이름이 너였는데, 너말고 난 무엇을 부르고 있었는지.
아프다. 내가 날 견디지 못하는 게 아프고, 네가 날 견디지 못하는 게 아프고, 아프다고 주문걸수록 죽지 않는 현실이 아프다. 아픈 것이 전부인 밤이 아프고, 다 아파서 울지도 못하는 것이 아프고, 그냥도 아프고, 마침내 네가 제일 아프다.
내가 믿는 건 오로지 아픈 것. 내가 살아온 것은 아픈 것. 나의 희망도 아픈 것.
나는 욱신거리는 햇살과, 발목 서러운 출근길과, 함부로 사랑하는 일을 믿기로 했다.가은, 네가 아니면 어떤 것도 아프지 않기로 했다. 더 열심히 사는 일이, 더 열심히 널 사랑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나에서 너가 되었고, 너에서 가족이 되었듯이 현실의 빛이 우리를 멀게 할지라도 반드시 사랑으로 남는 빛은 너일게다. 세상 모든 상처가 올지라도 너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을게다.
2020년 1월 1일. 다짐과 비명이 섞인 말을 남겨본다. 사랑하는 일이, 살아가는 일로 용서받을 수 없고, 살아가는 일이 사랑하는 일로 아름답지는 않겠지만. 삶과 사랑을 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너여서, 세상의 모든 걸 네 이름 하나로 불러본다.
나는 문득,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단어를 알게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