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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an 16. 2019

싸일런스(침묵)

침묵한다는 그래도 존재한다는 것.

  양화진문화원 강의를 가끔 생각나면 찾아 듣는다. 지적 허영심을 채워줄 먹잇감을 찾던 중 cbs 변상욱 대기자의 강의가 있어 바로 클릭. 앞선 진행자의 장황한 소개는 '딴짓'으로 넘기고 대기자의 인사와 첫 멘트에서부터 집중하기 시작했다.


  변상욱 대기자는 영화 '사일런스' 얘기부터 꺼냈다. 이 영화는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영화화했다고 했다. '침묵'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제목이 아닌가?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처음 알게 된 엔도 슈샤쿠의 '침묵'. 그저 간략한 줄거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영화로 나왔다니 빨리 보고 싶어 졌다. 대기자의 강의를 잠시 멈추고, 바로 영화를 검색하여 5천 원으로 결제했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자신들의 신앙 스승인 '페레이라'가 일본으로 선교를 나갔다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포르투갈의 두 제자 신부가 '페레이라'를 만나고자 일본으로 건너와서 자신들이 가져온 종교(크리스트교)를 다시 설파한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를 거부하는 위정자들로 인해 마을 주민들은 고문을 당하며 죽어나가고, 두 신부는 이 장면을 고통 속에 지켜보며 신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신은 '침묵'한다.


  책을 읽어보겠다고 생각한 지 언 20년.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영화로 접한다니 새롭게 느껴졌다. 대학시절 이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나서 학생들에게 던진 교수님의 질문이 떠올랐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 '침묵으로 일관하는 하나님'. 침묵의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침묵한다는 건 그래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일본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신부 '로드리게스'가 밀려오는 파도에 잠겨 신의 침묵에 한탄하며 쓸쓸히 죽는 것으로 결말을 예상했지만 반전이 있었으니.


  그는 그대로 순교하지 않았고, 배교했다. 그의 스승 페레이라와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예수의 성화를 밟는 '배교 테스트'는 어릴 적부터 교회 설교 당골 메뉴였다. 목사님이 '침묵'이란 책을 읽으셨는지 아니면 구설로 전해 들으셨는지 잘은 모르지만 6.25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배교 테스트'는 단순하다. 예수님 성화를 밟고 침을 뱉으면 살고, 아니면 죽는다. 영화상에서 많은 '키리시찬'이라고 발음되는 일본인 신도들이 성화를 밟지 않고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신부. 자신이 전한 '크리스트교'라는 종교로 인해 많은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계속해서 숨어 지켜본다.


  일본 위정자들의 배교 회유책은 역시 고도의 기술이다. 일본인의 디테일하고 테크니컬 한 모습이 부각된다. 신부만 배교하면 신도들의 고통은 없다고 설득하며, 그게 아니면 신도들은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목에 살짝 상처를 내, 핏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며 아주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 고통을 맛본다.


  내가 신부라면 배교할 것인가?


  신부는 결국 배교한다. 페레이라 신부는 집행자들만 알 수 있는 미미한 제스처 하나로 배교했다. 적극적인 부인이 아니면 결국 긍정인 거다. 예수의 성화에 발가락만 스쳐도 배교로 인정하고 살려주겠다는 그 뿌리치기 힘든 유혹과 기술적인 요구.


  그들이 성화를 밟는 삶과 죽음의 순간,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침묵'했다.


  오늘날 일본은 크리스트교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1600년대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배교로 인해 크리스트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아닌가?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지만 말이다.


  '왜 나를 돕지 않는지 않느냐'며 '신이 존재하긴 하느냐'며 원망하고 있는 내가 이 영화를 통해 '신이 침묵하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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