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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휠로그 Jan 24. 2024

독일 고성능차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몰입형 퍼포먼스 SUV, 마세라티 그레칼레 트로페오

레이싱 헤리티지의 현대화, 1억 7,410만 원의 가치


이 수치 맞나? 최고 출력 530ps, 최대 토크 63.2kg∙m.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속 페달을 밟을 때 노면과 타이어가 벨크로로 붙은 것 같은 뻑뻑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이나마 열심히 부대껴본 결과, 이거야말로 독일 브랜드나 전기차 브랜드 식 고성능과는 다른 마세라티만의 특성이고 질감이었다. 그 차이의 지점에 ‘몰입’이란 표지판이 있었다. AMG와 폭스바겐그룹, BMW 등 저먼 머신이 지배하는 퍼포먼스카의 세상에서 잊혀진 줄 알았던 특별함을 마세라티 그레칼레 트로페오로 만나보았다.



자연흡기 감성 놓을 수 없어,

마세라티 SUV 그레칼레 트로페오의 네튜노 엔진 


2010년대 중반부터 고성능차 영역을 압도했던 건 독일 브랜드 머신들이었다. 이들은 고성능 디비전을 기존 작은 사업부에서 하나의 독립 법인으로 바꾸고 레이스와 연계해 개발, 모터스포츠, 마케팅 등을 일체화했다. 그리고 고성능 디비전의 라인업을 다양화해 대중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개선해 시장 지배력까지 강화했다.

상대적으로 영국과 이탈리아의 전통적 명가들은 침체됐다. 주요 럭셔리 브랜드의 파워트레인 개발 시계는 멈췄고, 그나마 명맥을 잇는 브랜드들은 독일 머신의 엔진을 사서 노후화에 대응하는 정도였다. 마세라티는 그러지도 못한 채 침체기를 걸었다. 


그러나 2018년 페라리 회장에 취임한 존 엘칸은 직간접적으로 마세라티에 대한 애정을 보이며 챙기기 시작했다. 오리지널 파워트레인을 장착한 MC20과 그레칼레의 등장은 그 후광이었다.



이 두 차량의 등장은 단순히 새로운 차량의 출시를 넘어 고성능차 브랜드답게 파워트레인에서 오리지낼러티를 드러낸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사골을 넘어 아교가 된 과거를 버리고, 맑고도 거센 파도 같이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고자 한 것이다. 3.0리터(2,992cc) V6 트윈터보 엔진인 네튜노(Nettuno)를 개발했다. 참고로 MC20의 네튜노 엔진은, 엔진 오일 탱크를 따로 두는 드라이 섬프이고 그레칼레 트로페오의 네튜노 엔진은 웻 섬프 방식이다. 


그레칼레에 적용된 네튜노 엔진의 최대 토크는 동급 배기량의 타사 고성능 엔진에 비해 조금 낮다. 물론 63.2kg∙m의 토크가 적은 수치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한 급의 차에 비해 가속 페달을 밟아도 살짝 빡빡하다. 최대 토크 전개 시점도 3,000rpm으로 트윈터보 엔진 치고는 조금 늦다. 하이브리드 기반인 모데나, GT와 달리 스트로크(피스톤이 움직이는 길이)가 82㎜로, 보어(실린더 안쪽 지름) 88㎜보다 짧다.



물론 0→100km/h 가속력은 3.8초로 동급 엔진 세단들과도 큰 차이가 없다. 즉 이 엔진은 ‘토크빨’로 밀고 나가는 차가 아니라 530ps의 최고 출력을 온전히 운전자가 페달로 섬세하게 컨트롤할 자유를 주는 타입인 것이다. 또한 연료 분사 전 단계에 프리 챔버(Pre Chamber)를 두고 350바 압력의 직분사와 6바 압력의 간접 분사를 병행하며, 실린더 측면에 세컨더리 점화 플러그를 두었다. 네튜노 엔진의 정식 명칭인 MTC(Maserati Twin Combustion)는 이런 구조에 기인한다. 덕분에 가속 페달을 조작하는 전 범위에서 다른 고성능 터보엔진과는 다른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마세라티 하면 떠오르는 굉음은 아니지만, 배기음과 구동음도 고르고 안정적이다.  



운전자가 먼저다

생물처럼 반응하는 운동 성능 


네튜노 엔진의 이러한 특성은 그레칼레 트로페오의 전반적인 주행감각에도 영항을 미치며, 그것은 독일 브랜드들의 고성능과는 전혀 다른 경험으로 다가온다. 일단 구동력의 조절이 운전자 관점에서 직관적이고 세밀하니 운동 성능을 경험하는 데 있엉서도 운전자가 주체적인 입장이 된다. 강력한 토크로 인해 코너에서 발생하는 물리력을 차체와 시스템이 어떻게 잡아 줄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독일 고성능차와 다른 방식 즉 인간 중심의 드라이빙인 것이다. 



주행 모드 중 트로페오 전용 모드인 코르사(Corsa)는 그 정수다. 자동 긴급 제동, 자세 제어 장치의 개입은 최소화하며, 변속기에서 저단 지속 시간을 길게 가져간다. 차고는 한 단계 더 낮아지고, 에어서스펜션은 조금 더 단단하게 반응한다. 가속 페달의 반응이 세밀하다 보니 내리막 코너에서도 브레이크보다 패들 쉬프트를 간간이 한 단계씩 사용하는 것도 재미있다. 급격하게 굉음이 난다거나 하기보다 회전수가 부드럽게 올라간다. 흔히 고성능차는 괴물에 비유되지만 이 차는 괴물보다는 주인과 유대감이 높은 동물을 연상시킨다. 


코르사 모드에서는 스티어링휠이 조금 더 무겁긴 하지만 전체적 조작감은 부드럽고 가볍다. 전륜의 경우 여러 부품들의 힘 작용 방향을 조절해 킹핀의 역할을 대체하는 세미 버추얼 방식의 조향축이 적용되는데 이 덕분에 핸들 조작이 쉬우면서도 조작과 실제 조타 연결이 유기적이며 유연하다. 아무래도 지상고가 높은 차라 좌우 롤(roll)이 아주 없을 순 없지만 하중의 이동과 복원도 자연스럽고 안정적이다. 그러면서도 차의 머리가 목표를 놓치지지 않는 스포티한 성향도 갖고 있다. 후륜의 리미티드 슬립 디퍼렌셜(차동 제한 장치)는 전자식이다. 하이브리드인 모데나와 GT의 경우 기계식(M-LSD)이 장착된다.



이렇게 운전하는 동안 무엇보다 몸과 손이 편안하다. 마세라티의 시트 착좌감은 어떤 브랜드와 견주어도 양보할 수 없지만 특히 부드러운 가죽의 질감과 견고한 밀착감을 가장 큰 개성으로 한다. 즉 고성능 브랜드들이 알칸타라를 선호하는 것과 달리, 운전자와 차가 살과 살을 섞는 느낌을 준다.  



SUV 넘어서는 퍼포먼스 디자인

마세라티 뉴 에이지의 시작 


포르쉐의 카이엔, 마칸의 관계와 달리, 그레칼레는 르반떼와 다른 시간 축 위에 서 있다. 디자인 면에서도 르반떼가 콰트로포르테 시대의 영향력 안에 있다면 트로페오는 MC20 그리고 곧 국내에도 선보일 스포츠카 그란투리스모 등과 비슷하다. 그릴부가 앞쪽으로 쭉 멀리 나와 있고, 좌우 휠 아치 위로 글래머러스한 볼륨감이 표현된 모습 등은 1950년대 레이싱 머신에서 시작해 3200GT 같은 전설적인 차를 거쳐 온 마세라티의 디자인 헤리티지 첨단화라 볼 수 있다. 특히 본격적으로 신모델 라인업이 다 갖춰지는 2024년은 알피에리 마세라티가 회사를 연 지 110년 되는 해인만큼 의미 있는 디자인이다.



내연기관 기준 최상위 모델인 트로페오의 포인트는 레드 컬러의 윤곽이 있는 ‘Trofeo’ 레터링과 역시 레드 포인트를 준 튜닝포크다. 여기에 붉은색 브렘보 캘리퍼 블럭이 측면 스타일을 살린다. 후미에서는 쿼드 머플러와 스키드 플레이트, 그 위로 카본 파이버가 적용돼 튜닝카스런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사양을 감안하면 1억 7,410만 원인 트로페오의 가격은 합리적이다. 특별히 옵션을 선택해야 할 필요도 없고 한국의 고급차 수요자들이 원하는 사양안 모두 갖춰져 있다. 그레칼레의 경우는 과거 마세라티와 달리 내구성이나 소프트웨어 등에서의 오류도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쁘니까 서 있는 시간도 길다던 예전의 오명을 조금 덜어낸 모양새다. 


어차피 마세라티는 대중보다는 ‘신도’가 먹여살리는 브랜드다. 기계적 완벽성보다도 운전자의 본능과 교감하는 레이싱 머신의 헤리티지에 감명받는 부유층이 원하는 것이 마세라티다. 다만 지난 십수년 간 구 FCA 그룹의 전략은 마세라티의 이런 정체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매스 브랜드와 신구 대륙이 혼재하는 브랜드 포트폴리오에 하나하나 신경을 쏟기 힘들었고 그 와중에 마세라티는 잠시 길을 잃었다. 


하지만 110주년을 맞이하는 2024년을 앞두고, 수 년 전부터 스텔란티스 그룹 내부에서도 마세라티를 보는 시선을 달라져 있다. 연장될 것으로 기대되는 내연기관의 시간은 마세라티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2억 원 미만 고성능 차종 중 대체하기 힘든 몰입감을 선물하는 SUV를 원한다면 좋은 선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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